냄새
중학교에 진학을 하고 호중과 같은 반이 안되었더라면 그와의 인연은 지속됐을까, 혹은 우리를 평생의 친구로 만들려고 누군가 작정이나 한 것일까? 수레 바큇살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 동네 구석구석 어디든, 뻗어 있는 잿빛 단지는 중학교를 제외하고는 초, 고등학교가 단 하나뿐이어서 공터에서 한 번은 공을 함께 차 봤던 친구들은 웬만하면 한 번씩은 같은 반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좁은 동네였다. 같은 반으로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동네 친구들 중에서 특별히 우리를 연결시킨 연결고리는 무엇이었을까.. 성인이 되고 각자의 이유로 동네를 떠나고, 대학을 진학하고 , 결혼을 하고, 이유라면 수많은 이유로 연락이 끊기고 영문을 알 수 없는 두절이 너무도 흔한 세상이었다. 그러나 해와 달, 빛과 어둠처럼 인연이 다가오면 악연 또한 신기하게도 함께 온다는 걸, 의자와 상관없이, 13살 그때의 나는 과연 느끼고 있었을까, 규호가 동네의 다른 중학교로 전학하고 우리가 잠시 연락이 끊긴 그 3년은 어쩌면 내게는 가장 악몽 같은 학창 시절이었다. 내가 그 시절을 떠올리기 싫어하는지 호중이 알지 모르겠으나 그 시간을 함께 견딘 건 다름 아닌 호중과 함께였다. 그리고 규호와 연락을 끊고, 내 의지로, 몇 년이 지나고 암에 덜컥 걸렸으니, 참으로 비과학적이지만, 그와 나도 어쩌면 지독한 인연일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관계로 이어지는 인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악연도 뒤따라오는 법이니깐. 또래보다 한참은 작은 키 때문에 교사의 침 세례를 받을 수밖에 없는, 바로 앞줄도 아닌, 두 번째 줄을 배정받고 자리에 앉자 익숙한 얼굴이 짝꿍으로 앉아있었다. 각진 턱과 짙은 눈썹 아래 약간은 불만을 품고 있는 눈빛을 어디선가 봤을까, 공터에서 같이 공을 찼든, 아파트 벽면에 구슬을 같이 던졌던지,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 교사가 그의 이름을 호명하자 단번에 알아차렸다. 김학수, 불과 몇 개월 전까지 같은 반이었던 녀석을 이제야 기억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학수는 조용하고 나대는 놈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60여 명이나 되는 많다면 많고 적다고 하기엔 무리인, 일 년 내내 학수가 같은 반인 줄도 몰랐다는 사실이 내내 놀라웠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출입구만 다른 같은 동 주민임을 아침 등굣길에 알아버렸다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다행이었다. 아직은 중학교라는 새로운 세계가 낯선 소년에게는 아침마다 함께 등교할 친구가 있고 그 친구가 교실에서는 짝꿍이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관계가 될 거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12살의 눈빛이라고 하기엔 적개심으로 가득 찬 그의 눈빛은 언제 보았나 곰곰이 추적을 해보니 교사들이 침을 튀기는 그 자리에서 내가 아이들에게 무언가 말을 할 때였던 날이었다. 운동회, 야유회 같은, 교사는 교실의 한편에 자신의 책상에 몸을 구기고 편하게 앉아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그런 날, 반장인 나는, 오락 반장을 겸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퀴즈를 내고 정답을 맞히면 애들에게 선물을 주고 있었다. 당연히 퀴즈는 너무 쉬웠고 예상외로 아이들은 선물에 대한 욕심이 어마 무시했다. 교실이 떠나가라 손을 들고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 중에 한 명을 택하는 것은 제 아무리 전지전능한 솔로몬이라도 판단을 내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저기 불만도 섞여 나왔다. " 반장~! 내가 먼저 손을 들었다고!!" 처음엔 능숙한 광대처럼 연단에 올라 교사가 느껴봄직한 통솔력을 발휘하며 재밌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마에 땀을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너나 할거 없이 책상을 짚고 손을 크게 흔들고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소릴 지르는 아이들 속에서 우연처럼 학수의 얼굴을 본 것이다. 보았다고 말하기엔 표현이 부족하다고 단언할 수 있는 건 유일하게 학수만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어떠한 표정의 미동도 없이 나를 노려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표정을 스쳐 지나가면서 나의 진행에 불만이 있구나 혹은 아이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12살, 비록 초등학교 학년 중에 제일 연장자이지만 아직은 동심이 티끌처럼 남아 있어야 할 아이의 나이였다. 일 년 내내 말 한마디도 섞어 본 적이 없는 아이였으니 그렇게 어림잡아 짐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든 어떤 상황이든 멀찍이 떨어져 보면 그 무엇도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학수와 어쩔 수 없이 가깝게 지내면 알게 되었다.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으로 올라가면서 달라진 점은, 불과 몇 개월 전까지 , 아침마다 규호가 나의 게으름을 문 앞에서 기다렸다면 이번에는 학수의 게으름을 연신 기다리는 건 내 몫이었다. 그놈의 대변이 문제였다. 내가 집 앞 초인종을 누르면 아직 해결되지 않은 큰 일의 신호가 그제야 오는 것 같았다. 학교에 가서도 그 일을 해결할 수 있었을 텐데 녀석은 나의 애간장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이 매정하게 화장실로 직행했다. 이제 슬슬 어린아이의 티를 벗고 인중에 거뭇거뭇한 수염이 자라는 13살의 소년들이 친구를 사귀는 방식이야 기껏해야 짝꿍, 앞자리, 뒷자리의 사내아이들과 말을 트는 정도였다. 좀 더 오지랖을 발휘하면 옆 줄의 비슷한 체격의 친구 정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호중의 존재를 알게 된 건 바로 옆줄에서 울리는 녀석의 재채기 소리 때문이었다. "애~취~!!!"
호중은 마치 재채기가 올라오길 기다린 사람처럼 교실이 떠나가라 재채기를 해댔다. 일부러 좀 더 인위적으로 크게 낸다고 생각할 만큼 교실을 요란하게 만드는 녀석의 재채기 소리는 선생도 깜짝 놀라 분필을 떨어뜨릴 정도였다. 간혹 연달아 그런 소릴 내면 아이들은 교실이 떠나가라 한바탕 웃었고 교사는 짐칫 열 받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렇다고 학생의 생리현상 갖고 뭐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 나였다면 손으로 입을 가리고 행여 수업에 방해가 될까 소리를 최대한 죽여 재채기를 했을 텐데 호중은 남의 시선은 안중에도 없는 듯 온 힘을 다해 재채기를 했고 내게는 그의 그런 모습이 퍽이나 무례하고 무식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휭~" 하고 행사의 마지막 의례처럼 코를 시원하게 손가락으로 풀고 콧물을 뽑아내면 사라졌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다시 찾아와 교실이 떠나가라 울려댔다. 어쩌면 호중은 누구나 참을 수 없는 재채기로 아직은 서로에게 서먹서먹한 13살 남자아이들에게 자신은 이런 놈이라고 신고식을 한 것인지 모른다. 그리고 그런 호중에게 학수는 호감을 느꼈는지 먼저 말을 걸었다. "어이~ 황비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