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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목 Feb 18. 2022

소설<알쏭당>

냄새

씨네필은 소주잔에 넘칠 듯 술을 붓더니 자신의 잔을 힘겹게 들었다. '어서'라고 씨익하고 미소를 짓는 그녀의 슬픔에 젖은 눈을 바라보며 소주를 식도로 흘려보냈다. 알코올은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곧장 가지 않고 심장에 머물다 가는 듯 온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만날 생각은 없는 거예요?.."

이곳에 오면서 느꼈던 더러운 충동을 들키지 않으려 마음에도 없는 순진한 말을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씨네필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어느 정도의 침묵은 누나와 나 사이에 필요할 만도 한데 정적을 이기지 못하고 쓸데없는 소릴 한 것 같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갑작스레 어떤 미동도 없이 뚫어져라 내 눈을 바라보는 그녀는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규호가 너한테 뭐라고 말해?.."

씨네필은 규호에 대한 미련이 남은 건지 그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은 지 말끝을 흐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말 끝을 흐리는 씨네필의 나지막한 음성이 어찌 됐는지 규호 특유의 웃음소리와  어우러져 소주가 훍고 지나 간 속을 더 쓰리게 만드는 것 같았다.

"누나랑 헤어졌다고만.. 말했지.. 별 말은.."

괜스레 나도 말 끝을 흐리며 말하며 내심 아뿔싸 라고 말을 하고 있었다. 좀 더 단호하게 말을 했어야 했다.

그래야 씨네필은 더 이상 소주를 저렇게 울대를 드러내며 넘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좀 더 단호하게, 좀 더 냉정하게, 거짓을 꾸미더라도 그것이 누나를 위하는 일이라고 어디라고 말을 할 수 없는 곳에서 내게 계속 언질 하고 있었다. 내가 말을 하는 동안 잠시 숨을 멎은 듯 집중하는 씨네필의 호흡을 느끼자 불현듯 집을 뛰쳐나와 택시를 잡고 한걸음에 달려온 내 모습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래, 그녀는 불과 며칠 전까지 가장 아끼는 친구의 여자였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담배를 끊는다고 약속을 하고..."

나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는 무얼까? 단지 자신의 넋두리를 늘어놓기 좋은 상대여서 일까? 규호를 제일 잘 알고 있는 사람도 나였고 연애 초기부터 둘을 지켜본 사람도 다름 아닌 나여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누나는 친구의 여자 친구로 규호의 집에서 언제나 편하게 보는 사이가 되었지만 소주를 사이에 두고 단둘이 마주하니 유난히 짙은 검은 눈동자와 매끈한 검정 머리칼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아직 위장에 다다르지 못하고 심장에 머물고 있는 미련 많은 알코올 때문인지 가슴 한가운데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몇 번 담배를 몰래 피우다 걸려서 좀 싸웠고.. 너도 알다시피 담배를 하루아침에 끊는 게 어디 쉽니.. 나도 노력했거든.. 그런데 저렇게 과하게 할 이유가 없잖아.. 담배를 피우는 걸 모르고 사귄 것도 아니고.."

누나는 내게 미안하다는 눈짓을 하고 담배 한 개비를 한치의 실수도 없이 엄지 손가락과 검지를 이용하여 몇 개 남지 않은 헐렁한 담뱃갑에서 빼어냈다. 

"누나, 나도 하나 줘요~"

씨네필은 살짝 당황한 듯 쳐다보다가 망설임 없이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담뱃갑을 움켜쥐고 빛바랜 나무 탁자 위로 눈 깜짝할 사이에 배달했다. 담뱃갑을 흔들어 담배 한 개비를 누나처럼 한 번에 집으려 했으나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두어 번의 시도 끝에 담배 한 개비를 집자 누나는 마치 이 순간을 기다린 사람처럼 재빠르게 라이터를 갖다 댔다. '지익'하는 소리와 함께 담배의 각초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종이가 타들어갔다.

"하하하, 너무 귀여워~"

방금 전까지 내내 우울한 표정으로 술잔을 들던 씨네필은 어설프게 담배를 무는 내 모습이 우스꽝스러운지 취기가 섞인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니 덩달아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활짝 피어 올라왔다.

화들짝 놀란 듯 개화한 이 꽃은 그 어떤 이성으로도 막을 수 없는 통제 밖의 본능이었다.

"누나가 웃으니 좋네요~"

진심이었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서라도 누나의 환한 표정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씨네필에 들어서는 순간 그곳의 분위기를 오래전부터 지배하고 있는 사람 같던  누나는 어쩌면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매력이 있는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단순히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사람을 넘어서 작은 표정 하나에도, 살짝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면 주변의 분위기조차 순간 어두운 그림자를 몰고 다니는 그런 전염병 같은 여자라고 생각했다. 새벽 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천호동의 한산했던 선술집은 일순간에 누나의 미소를 온전히 받고 있는 것인지 온 몸의 세포들이 하나둘씩 살아 움직이듯 모든 사물과 사람들이 한결 살아 움직이듯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누구 때문이라고 선뜻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 소주 한 병을 금세 비웠다. 발가락을 꿈틀거렸다. 발가락을 오므렸다 펴며 반복하자 취기는 어느새 기분 좋게 온 몸을 휘감고 발가락을 통해 분출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았다.

"너 얼굴이 빨개~크크, 자꾸 발로 칠래? 크크"

씨네필은 있는 힘껏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내 발을 밀쳐내려 했지만 와닿지 않고 바닥을 쓸기만 했고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베시시 웃음을 짓다가 정신줄을 놓고 , 알코올이 식도를 타고 목적지로 곧장 가지 않고 어디론가 센 것처럼, 원래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뜬금없는 말을 내뱉었다.

"누난 참 사랑스러워요~"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그동안 본 적 없는 씨네필의 당혹스런 표정을 훔쳐보듯 목격하자 당장은 연유를 알 수 없는 묘한 쾌감이 전기처럼 척추를 타고 올라와 경추에 다다라 뒷통수를 기분좋게 후려팼다. 순간 아, 진정한 정화는 나도 모르게, 어떠한 조건이나 정해진 단계없이 자연스럽게 드러날 때구나..아마도 가장 순수한 정화가 있다면 지금 일거야...씨네필이 서둘러 표정을 화장하듯 고쳐잡고 경로를 다시 설정하려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자, 더욱 더 그녀를 알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심장을 자극하는 충동은 도통 제어가 되질 않았다. 쿵쾅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더니 귓가를 때렸고 온 몸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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