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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A Sep 20. 2016

Prologue

배낭을 싸기 시작했던 2004년의 여름에서

2002년이 끝날 무렵, 나는 처음으로 배낭을 쌌다.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해외 교환학생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휴학을 했던 때였다. 7살 나이로 초등학교(그 당시는 국민학교였다)에 입학했던 이후로 처음으로 학생 신분을 벗어나 1년 동안 돈벌이에 매진했던 나에게 주는 일종의 ‘상’ 같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친구와 둘이 떠나는 일본 여행을 준비했는데 출발을 이틀 앞두고 친구가 갑자기 집안일로 여행을 가지 못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나의 고민은 시작되었다. 원래 겁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틀 뒤엔 덜컥 혼자가 되어 덩그러니 낯선 땅에 서 있게 되리라고 생각하니 걱정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결국 선택은 나의 게으른 성격이 깔끔하게 정리해 주었다. 이미 예약해 놓은 교통편이며, 숙박을 일일이 취소하기가 너무 귀찮았던 탓이다. 그렇게 에라 모르겠다, 고 출발한 나의 첫 배낭여행은 아무런 계획 없이 시작되었고 처음으로 온전히 혼자가 된 시간들 속에서 그 당시 나의 최대 관심사였던 일본의 건축물들을 실컷 보러 다니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요기 거리들을 만끽했다. 

그러나 뒤돌아 보면, 나의 첫 배낭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건축 견학에 가까웠던 것이리라. 물론 책이나 잡지에서만 보던 건축물과 거리들을 직접 마주 대하며 신기해하고, 또 감탄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뿐, 내 마음에 더 이상의 감동과 감흥은 자리잡지 못했다. 


이후, 준비했던 대로 2004년에 나는 교환학생으로 영국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의 짧디 짧았던 6개월의 시간은 내 삶을 통째로 바꿔놓았다. 내 생애 처음으로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 겉모습이 다른만큼 내가 알지 못하는 세상에 대해 알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그들의 이야기가 숨 쉬고 있는 그들의 자리에 가보고 싶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아니, 가 보아야 직성이 풀릴 것만 같았다. 

내 마음을 간질이는 요동을 참지 못하고 학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유럽은 물론이고 아프리카와 중동 언저리까지 휩쓸고 다니며 10kg 배낭 하나에 짊어진 여행의 참 맛을 깊숙이 알아버리고 말았다. 여행시기가 한 여름 성수기였던 때문인지 학교 다닐 때 <서양건축사> 책에서 본 듯한 관광지와 관광객으로 들끓는 주인 없는 유럽의 도시들보다는, 여행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음을 활짝 열어 친구가 되는 사람들이 그득했던 아프리카와 중동에서의 시간이 가슴에 오래 남았던 것은 비단 나만 겪은 일이 아닐 터이다.

그 시간, 그곳에서 나와 추억을 공유했던 메멧 아저씨와 만도뿐 만 아니라 이 책에 실리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이 뻐근해진다. 그 여행 이후에는 가이드북도 버리고, 유명한 관광지를 따라 하루 종일 종종거리는 일정도 버리고, 목적지만을 향해 달리거나 무엇이든 눈으로 확인해 봐야만 속이 시원했던 내 마음까지도 모두 버렸다. 자연스레 버려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까? 한 부분을 버리니 또 다른 한 부분이 더 커다랗게 자리 잡는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여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대책이 없는 대단한 길치에, 방향치인 것을 알았지만 이러한 재능이 목적지를 향하는 여행이 아닌 길 위의 만남을 따르는 여행에 있어서는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기뻐했다. 여행을 하면서 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즐기며 이 쓸만한 도구가 낯선 사람들과의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마음을 여는 데 생각보다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 여행을 하면서 따뜻한 이야기가 스민 사람들의 사진을 좋아하여 내가 사진을 찍고 그것을 나누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뿌듯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꽤나 불운한 사람이라고 여겼었는데, 여행을 하면서 곤란한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도와줄 이가 나타나고 우연히 마주치는 인연이 나에게 감동을 넘치게 안겨주는 횟수가 많아지면서 나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고 그런 나를 더 사랑하게 되었다.  

요즘 ‘휴먼라이브러리’라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이는 덴마크에서 시작된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대화하고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편견과 고정관념을 없애고 인간적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자는 취지의 사회운동이다. 갖가지 지식과 기술이 적나라하게 흩뿌려진 세상이지만 새삼 사람 간의 소통, 사람의 이야기와 사람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이 주목받고 있는 시대인 것이다. 이런 거창한 인류애를 발현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더라도, 십 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여행을 통하여 깨달은 바는 내가 그 시간 동안 행복했고, 두근거렸고, 뿌듯했고, 감동받았던 이유의 9할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빔 벤더스(Wim Wenders) 감독의 <한 번은>이라는 책을 좋아한다. 그 책처럼 여기에 나의 스쳐 지나가는 ‘한 번’의 공간과 시간을 남긴다. 인정하고 싶지 않아도 여행 중의 인연은 남은 생에서 다시 만날 수 있는 사람보다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많을 테니 어쩌면 진짜 ‘한 번’의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내가 있었던 ‘그때’에 ‘그곳’에서 ‘그 사람’과 함께 한 이야기. 지난 십 년 간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고스란히 들추어내니 가슴이 벅차오른다. 

여행의 가치를 나와 같이 길 위의 만남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난 여행에 대한 추억에 진하게 빠져들 수 있고, 혹은 나와 같은 여행을 아직 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나보다 더 행복한 자신만의 여행을 꿈꾸게 되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이제까지와는 조금은 다른 형태의 여행이 되겠지만, 나는 여전히 다음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 앞으로 남은 나의 인생도 늘 같은 여행자의 마음으로, 배낭 하나면 충분한 만큼의 삶의 짐을 짊어지고, 두려움 없이 사람들 앞에 한 걸음 내디딜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2014년 9월(어느덧 이 글을 쓴지도 2년이란 시간이 지나버렸다...)

삶 여행자 선승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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