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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뮤즈 Mar 11. 2024

칭찬, 웃으며 받기로 했다.

Remodeling Me

"넌 참 밝아서 좋아."


20대 시절, 편하고 밝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종종 들었지만, 진짜 나는 어둡고 우울한 사람이었다. 평소 감정을 꽁꽁 숨겨 주머니에 넣었다가 혼자 있을 때 마음껏 우울을 펼치했다. 사회화에 최적화된 모습과 개인적인 모습이 공존했달까. on & off처럼. 어차피 그것도 나, 저것도 나다.


나 때문에 분위기가 어두워지는 게 너무 싫었고, 내 문제나 기분은 오롯이 내 몫이라는 생각이 꽤 크게 차지했다. 덕분인지 외부에서 바라보는 나의 평가는 꽤 너그러운 편이었다.


문제는 그 너그러운 평가를 오롯이 받지 못했다. 가끔 누가 칭찬해도 금세 손사래 쳤다. 오히려 칭찬하는 사람이 민망함을 느낄 때도 있었다. 인사차 건네는 칭찬일 수 있으니 웃으며 ‘감사합니다’하면 될 것을 굳이 튕겨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쑥스럽고 민망했다.


이런 나와 달리 칭찬을 잘 받는 친구가 있었다.

어떤 칭찬에도, 칭찬의 사실 여부에도 상관없이 덤덤하게 ‘감사합니다.’ ‘제가 좀 그런 게 있죠.’ 하며

넉살 좋게 잘 받아냈다. 낯선 모습에 자꾸 시선이 머물렀다. 친구의 당당함은 마냥 신기했다. 


'나도 저럴 수 있으면 좋겠다.'


책 <나는 왜 자꾸 내 탓을 할까>에

‘스스로 칭찬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은 어떤 좋은 말도 칭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했다.


그랬다. 나는 스스로 칭찬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나조차 '나'를 혼냈다. '내가 보는 나'는 '어리바리하고 어수룩한 사람' '실수도 많고 느린 사람'이었다. 열정과 의욕만큼 따라주지 않는 결과에 지치면서 '내 탓'은 늘어났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클수록 괴로움도 커졌다. 비슷한 레일을 걷던 친구들은 하나둘씩 각자의 노선으로 벗어나면서 차이가 벌어졌, 자꾸 위축 됐다. 쓸데없이 기준만 높게 잡아놓고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자책도 수없이 했다. '칭찬은 그만큼 능력이 될 때 따라오는 것'이라고 정의하는 내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리 만무했다.


40대가 된 지금, 현실과 타협이 쉬워지고 자존감은 그때보다 상승했다. 능력치가 올라간 게 아니라, 다른 능력이 생겼다.


인정과 포기가 쉬워진 것.


'능력이 안 돼서'보다 '나와 맞지 않아서'가 편했다. 각자 사람마다 다른 길이 있고, 속도가 다를 뿐이다.

세상엔 너무 많은 선택지가 있었고, 나와 안 맞는 것들을 걸러내는 과정이 필요했 뿐이다. 미련하게 아닌 걸 붙잡고 스스로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꽉 쥐고 있던 힘을 슬그머니 빼서 손을 편안히 툭 늘어뜨릴 수 있게 됐다. (나이 먹고 얻은 뻔뻔함도 무시할 순 없겠지만)


힘을 빼고 나니 칭찬의 무게가 예전만큼 무겁지 않다. 이젠 칭찬을 들을 기회도 별로 없지만, 어쩌다 칭찬을 들으면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한다거나, 가볍게 웃으며 인사하는 대처가 가능하다.  

부럽게 바라봤던 그 친구만큼은 아니지만, 인생을 사는 작은 요령 같아 나쁘지 않았다. 종종 화답으로 칭찬을 건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칭찬을 하는 건 듣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다. 칭찬을 주고받는 모습, 상상만 해도 얼마나 훈훈한가. 혹독한 현실에서 한 줄기 따뜻한 위로..


칭찬 속 진짜 알맹이는 그 말에 담긴 상대방의 호의였다.


'나를 좋게 봐줬다는 것'


그 하나만으로 참 감사한 일인데 그걸 몰랐다.


혹시 누군가 그 당시 나처럼 칭찬을 잘 소화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한 마디 슬쩍 건네고 싶다.


”그냥 살짝 웃기만 하셔도 괜찮아요."


그러니 과하지 않게, 부담스럽지 않게

칭찬해 준 사람의 성의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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