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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뮤즈 Jul 24. 2024

오랜만에 쓰는 편지

일상 속 짧은 파편

한 때 '편지 쓰기'가 취미였다. 마음에 드는 편지지를 발견하면 망설임 없이 구입했다. 종류별로 구비된 편지지와 편지 봉투는 기분 따라, 편지 받는 상대에 따라 골라 쓸 수 있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언제부터 편지 쓰기가 취미가 됐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 난다.


초등학교 땐 일기를 쓰고 펜팔을 했다. 8-90년 대는 만화잡지 뒷면에 '펜팔 해요~'코너가 있어서 펜팔을 쉽게 시작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개인정보 노출을... 나름 순수한 시절..) 해외 펜팔 친구도 있었는데, 서툰 영어지만 영어 사전을 뒤져가며 한 줄 한 줄 정성스럽게 썼다. 낯선 친구와 편지를 주고받는 기분은 묘한 설렘이었다.   


중학교 땐 다이어리가 유행이라, 다이어리 속지를 한 장씩 나눠가지며 짧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친구들이 써준 편지로 채운 다이어리는 재산목록 1호였다. 글을 쓰다 보니 기억이 조금씩 난다. 아마 이때부터 친구한테 편지 쓰기가 취미가 된 것 같다.

  

교환노트를 쓴 적도 있다. 마음에 드는 노트를 같이 구입하고 꾸미고 하루는 네가, 하루는 내가 그날 느낀 감정, 생각을 적으며 공유하는데, 편지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점점 디지털화가 진행되면서 아날로그 노트는 다음(daum) 비공개 카페로, 싸이월드 비밀 게시판으로 옮겨갔다. 매일 마주치는 친구들이지만, 편지를 읽으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닌, 그 이면을 허락받고 들여다보는 기분이었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모습을 안다는 특별함은, '둘만' 아는 비밀을 공유하며 관계를 더 견고하게 만드는 동력이었다. 진한 소속감과 안정감이 느껴졌다.


편지 쓰기 취미는 20대까지 이어졌고, 편지를 쓰는 대상도 확장됐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구에게도 편지를 썼다. 그 시절 만난 친구 중에 나한테 편지를 한 장도 안 받은 친구는 없을 정도였고, 나중엔 편지 받는 걸 귀찮아하는 친구도 생겼다. (답장을 강요한 적도 없는데,답장에 대한 부담을 느낀 친구들이 종종 있었다. 정작 나는 여기저기 편지를 쓰느라 누구한테 썼는지 기억도못하고 있었는데.. )  

 

그냥 편지를 쓰는 자체가 좋았다. 편지를 쓰는 건 일기 쓰는 일과 또 달랐다. 일기는 오롯이 혼자만의 공간이라면, 편지는 상호적인 공간이다. 일기는 나만 생각하고 쓴다면, 편지는 상대를 생각하고 쓴다. 일기가 채워주지 못하는 감정을 편지가 채워준 셈이다. 늦은 밤 세상이 조용해지면 책상에 형광등을 켜고 앉아 편지지를 꺼낸다. 펜을 들고 사각거리는 소리도 좋고, 편지를 쓰면서 그 친구와 추억을 떠올리는 시간도 행복했다. 간혹 너무 오글거려서 편지를 찢고 다시 쓴 적도 있고, 아침까지 줄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준 적도 많다. 편지 쓰기는 많이 외로웠던 시절, 정서적 공허함을 채워준 소중한 취미였다.    


한 가지 감사한 일은 여전히 편지를 보내는 친구가 한 명 남아있다는 것. 사실 편지 쓰는 취미가 사라진 내가 먼저 쓰는 일은 별로 없고, 그 친구가 보내면 답장을 하는 정도다. 그것도 그 친구가 몇 통을 보내는 동안 주로받기만 하고 고마움은 전화로만 전달했다. '써야지~ '하면서 정신없다고 미루기만 했다.


며칠 전, 그 친구와 통화하는데 많이 힘들어 보였고, 마침 전해줄 것도 있어 답장을 쓰자'라고 마음먹었다.

서랍 깊숙이 들어간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찾았다. 그리고 오랜만에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펜을 들자마자

 "Dear. 000"을 썼다. 혼자 피식 웃었다. 편지를 쓸 때오랜 습관이었다. 항상 " Dear, 친구이름"으로 시작하는 습관. 습관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막상 편지를 쓰는 내내 낯설었다. 낯설어서 그런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낯선 기분을 뒤로하고 편지를 쓰고, 나름 조그마한 선물을 동봉했다. 주소를 적고 편지봉투에 넣어 스티커를 붙였다. 완성하고 나자, '이게 뭐라고 이렇게 미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음 날, 편지를 들고 우체국을 방문했다.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가는 우체국인데, 오랜만이었다. 예전엔 참 자주 가던 곳이다. 그땐 사람이 많아 대기를 했는데 요즘엔 한산하다. 조금 민망한 듯, "편지예요" 하며 내밀었다. 요즘엔 다 등기로 보내서 우편이잘 도착했는지 확인이 가능해서 편하다.   


동봉한 선물이 분실되지 않기를..

제때 친구 손에 편지가 도달해서 위로가 되기를..  


다시 편지를 자주 써보자고 마음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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