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른뮤즈 Aug 15. 2024

귀뚜라미 잘못이다.

일상 속 짧은 파편

12시가 다 돼가는 시간. 침대에 누워 전자책 리더기를 집었다.


'읽던 부분만 마저 읽고 자야지.'


한참 재밌게 읽던 책이 얼마 남지 않아 덮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시간이 멈춘 듯, 집중해서 읽고 있는 데 주방 쪽에서 '웅웅'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잠깐 책을 놓고 귀를 기울이니, 양치하는 남편이 칫솔을 입에 문채 내는 소리였다. 뭘 떨어뜨리고 놀래서 내는 소리인가 싶어 대수롭지 않게 다시 책을 집었다. 짧지만 강한 어조로 소리가 반복됐다. ‘저건 뭔가 긴박하게 찾는 소리다!’ 오랜 결혼생활은 대화 없이 대화가 가능한 지경이다.


급히 화장실 쪽을 가니 바닥을 보며 '웅웅' 거렸다. 시선을 따라가니 바닥에 시커먼 무언가가 움직였다.

벌레..... 나도 모르게 '으~~'하는 신음소리가 났다. 다급히 휴지를 뽑아갔더니 이번엔 '으으응응'소리를 냈다. 아니라는 말이다. "왜. 왜 휴지가 아닌데? “ 짧은소리는 간단한 의사표현은 가능한 데 부연설명까진 힘들다. 답답한 마음에 "그냥 죽여. 왜?" 간절하지만 잔혹한 말이 서슴없이 나갔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는지, 칫솔을 빼서 치약이 튀지 않게 조심히 말했다.


"이뚜라미! (정확한 발음이 힘든 상태)"


벌레 정체는 다름 아닌 귀뚜라미였다. 세상에. 귀뚜라미라니. 당혹감에 몸이 굳었다. 죽일 수도 없으니 어째야 하나... 당황을 하면 이성적 판단이 멈추는 터라, 잠시 생각이 멈췄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우리만의 '죽이지 못하는 벌레 퇴치법'이 떠올랐다.


일단 날지 못하게 덮을 거.. 덮을 거.. 종이...


내 눈은 방 안과 주방을 위 아래 할 거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눈에 띄는 게 없다. 아무리 정신없다고 컵을 쓸 순 없지 않나.. 어쩌지.. 어쩌지.. 발만 동동 거리는 순간


"앗!"


남편의 외침이 들렸다. 귀뚜라미가 자취를 감춰버린 것이다. 남편은 귀뚜라미를 찾고, 나는 귀뚜라미를 덮을 걸 찾아 헤맸다. 잠시 후, 나는 버리려고 놔둔 조그마한 밀폐용기를 찾았다. 남편은 서랍장 안으로 숨어버린 귀뚜라미를 찾았다. 밀폐용기를 건넨 후, 곧바로 약간 두께가 있는 종이 한 장을 찢어 건넸다. 잽싸게 귀뚜라미를 덮고, 그 밑으로 종이를 넣는다.


포획 성공!


조심스레 들고일어나는 남편의 움직임을 주시하다가 잽싸게 대문을 열고 뒤로 빠진다. 두 손이 묶인 남편이 빠르게 대문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물 흐르듯 진행된다. 이럴 땐 찰떡호흡이다. 남편은 대문을 발로 닫아 놓아준 귀뚜라미가 다시 못 들어오게 원천봉쇄를 한고 안전한 장소에서 날려 보낸다. 한숨을 쉬며 남편이 들어온다. 미션 클리어! 무사히 끝났다는 눈인사를 건넨다.


"휴~~"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여운을 나눈다.


대체 귀뚜라미가 어디서 들어온 거지?

종이컵도 없고 마땅한 게 없어서.. 나 순발력 괜찮았지? 종이컵을 몇 개 사둬야 하나?

지난번엔 무당벌레였지?

다음엔 또 뭐가 들어오려나?


출처: 핀터레스트

집 앞에 조그만 산이 하나 있다. 해발이 낮아 동산에 가깝지만 베란다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면, 산이 살짝 찌그러진 동선을 그리며 뽈록 튀어나와 있다. 산 앞에 층수가 낮은 아파트만 있어 꽤 산이 크게 보인다. 그래도 산이라고 사계절이 변하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즐길 수있어 좋았다. 문제는 벌레다. 아무리 산이 있다지만 도심 속 아파트에서 본의 아니게 자연학습을 했다.


결혼 초, 산모기에 놀라 경직됐다.

잡아놓고도 당황했다. 얘한테 물리면 거의 수혈하는 수준 아냐? (그 정돈 아니다)

겨울엔 노린재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노린재 처음 봄)

독나방이 들어오고, 무당벌레도 들어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벌레도 수차례..

더 이상 새로운 벌레가 없겠지 할 때쯤 들어온 게 귀뚜라미다.


여운을 가라앉히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소동 덕에 잠이 깨서 눈이 말똥말똥했다. 소중한 잠을 달아나게 해 버린 소동을 다시 떠올리며 쓸데없는 생각에 잠겼다.


출처: 핀터레스트

(귀뚜라미가 실제로 이렇게 귀여웠더라면 생각하며 찾은 이미지....)  


원래 귀뚜라미는 나름 낭만 있는 곤충 아냐?

여름밤 한적한 시골길을 걷다가 귀뚜라미 소리를 들으면 '와 귀뚜라미 소리다' 하며 귀를 기울여 들었겠지?

마치 산책길 BGM처럼 여기면서 말이야.

도시엔 이런 낭만이 사라졌다고 한탄을 덧붙이겠지.

'귀뚜라미= 시골= 낭만'이라는 이상한 공식을 떠올리면서 말이야...


시골길에서 만난 귀뚜라미는 낭만적인데 집 안에 들어온 귀뚜라미는 처치해야 할 대상이 되네?

귀뚜라미는 그저 귀뚜라미일 뿐인데, 귀뚜라미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감히 내 영역을 침범한 귀뚜라미 잘못일까

상황에 따라 변한 내 태도의 문제일까

내 잘못도 아니지. 집 안에 들어온 귀뚜라미를 놔둘 순 없지.


*귀뚜라미 소리는 짝짓기를 유도하거나, 영역을 선포하거나, 경고신호로 자신을 방어하는 독특한 소통방식이다. 신기한 건 온도에 따라 울음소리 빈도가 높아지기도 한다*


그럼 우리가 생각한 귀뚜라미 소리의 낭만이란 뭘까?

그저 귀뚜라미는 자신을 지키거나 생존본능일 뿐인데 낭만은 그저 사람들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한 걸까?


목에 걸면 목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산책길에 만난 귀뚜라미는 그 소리의 목적이 무엇이든상관없이 낭만 있는 소리고,

집 안에서 만난 귀뚜라미는 그냥 벌레에 불과한 건가


갑자기 스쳐 지나간 귀뚜라미는 잠 못 드는 여름밤 잡생각에 한 술 보탠다.


결론.. 우리 집에 들어온 귀뚜라미가 잘못이다.

이제 밖에서만 보자.... 제발..


매거진의 이전글 오랜만에 쓰는 편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