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에 새로운 꿈을 향해 도전하고, 그 꿈을 이룬 사람들을 보면 가끔 눈물이 핑 돈다.
그 용기와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부러워만 하는 자신을 힐책한다.
'너는 뭐 하고 있니?'
'그것밖에 안 되니?'
그래도 이내..
내가 나를 쓰다듬어 줘야지.
'언젠가 너도 할 수 있을 거야'라고.
꿈꿀 수 없는 이유는 수백 가지인데
꿈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 그 자체이기에
그래서 아직 나는 꿈을 꾼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거나, 스스로 해결하기 어려운 순간이 오면 책을 마구 뒤진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믿는 편이고, 힘들 때 접하는 문구들은 그 어떤 때보다 가슴 깊이 박히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마흔이 된 후, 불안감과 조급증에 시달리면서 '마흔'을 다룬 책을 검색했다. 생각보다 많은 책이 시중에 나온 것을 보며 한 편으로는 '나만 그러는 게 아닌가 보다'라는 위안 아닌 위안을 받았다.
<맙소사 마흔>을 쓴 작가는 40대는 이야기가 없는 시기이며, 죽음에 대한 자각이 시작되고, 무엇보다 이정표가 없는 나이로 인한 혼란이 찾아온다고 말한다. '이정표가 없는 나이'라는 문구가 그렇게 아찔할 수가 없다. 100세 시대에 기대수명을 80세로 잡으면 마흔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 나이다. 살아온 시간만큼 살아갈 시간이 비슷해지는 시기. 아직 많이 남았지만, 인생의 후반부는 신체 노화가 시작되는 시기로 삶의 질이 젊을 때보다 떨어진다. 실질적으로 전반부 40년보다 더 짧게 느껴지는 이유다.
후반부 40년에 대한 고민은 더 깊고 신중해야 하는데, 막상 이정표 없이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한숨이 새어 나온다.
스무 살 까지는 자유의지 없이 새장에 갇힌 느낌이 강했다. 학창 시절은 내 의도와 상관없이 인생 계획표가 존재했다. 시간표에 맞춰 공부를 하고, 궁극적으로 대학을 가야 한다는 단일한 목표를 위한 계획표다. 그 반복적인 생활은 지옥 같았다.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간에 끝이 있을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잊고 있었다. 끝은 항상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난 새삼 깨달았다.
늘 하던 걸 끝내는 것보다 끝내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 더 어려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그 시간이 가끔 그리운 건, 정말 아이러니하게 그토록 끔찍하게 싫었던 이정표 때문이다. 물론, 그때처럼 타의가 아닌 스스로 만든 이정표가 필요하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이정표 없는 선택은 매번 흔들린다. 무엇을 향해 달려가야 하는지, 무엇을 보며 가야 하는지, 지금 잘 가고 있는 건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러니 종종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이렇게 해봤자' 하며 스스로 무너지기 일쑤였다.
'이정표를 왜 잡지 못하는 걸까?' 질문을 던지면 답은 의외로 금방 나왔다.
꿈이 없다.
어릴 때 허무맹랑한 장래 희망 같은 그런 꿈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큰 목표나 목적이 돼 줄 꿈이 없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지만 그뿐, 삶에 생동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꿈이 없어서 힘들다 하면 그야말로 등 따시고 배부른 소리 하지 말란 소리가 불쑥 나오겠지. 현실적인 문제에 치여 살기도 바쁜데 꿈타령이나 하다니 정말 철부지 그 자체다. 내가 철부지인 걸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나 또한 그런 현실적인 문제를 고민하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문득문득 '이렇게 꾸역꾸역 버티며 살다가 막상 죽기 직전에 나는 과연 '잘 살았다'라고 생각하며 죽을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온다.
내 삶은 조급함과 잘못된 선택의 악순환이었고, 그로 인해 후회와 미련으로 가득 찬 상황에서 마흔을 맞이했다. 그래서 이렇게 지독한 사춘기를 겪는 건지 모르겠지만, 죽는 순간까지 그런 후회와 미련을 남기고 싶진 않다.
"안내판이 없다는 건 그릇된 길로 들어서면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의미보다는 애초에 길이 없으므로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뜻에 가까울 것이다."
-이기주, <언어의 온도>
거듭된 실패 속에 무기력에 빠지기도 했지만,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하자는 의지는 끝내 버리지 못했다. '아직은 마흔'이라는 생각에 더 무게가 실리기 때문이다. 적어도 50대는 지금 이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지 않다는 열망도 함께 남은 탓이다.
이제 내 삶의 이정표를 만들어줄 선생님도, 학교도, 부모님의 잔소리도 없다. 그립지만,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 30대든, 작년이든, 바로 어제든 실패한 시간은 모두 과거일 뿐이라는 세뇌를 해본다. 과거를 벗어나야 현재가 보이고, 현재를 알아야 미래를 꿈꿀 수 있다.
마흔이 되고 나서야 마흔에 대한 의미를 곱씹어 보기 시작했다. 예측하지 못했고, 준비하지 못했기에 혼란은 더 가중되지만, 그만큼 절실해진 것도 사실이다. 서른에 내 선택에 대한 실패의 원인은 방향 없이 앞으로만 가려했기 때문이다.
원인을 알았으니 수정하고 보완하면 된다. 나는 40대 내 삶의 이정표를 제대로 하나씩 다시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길을 잃었지만 내가 걷는 길이 어디든 길이 될 수 있다. 까짓 거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지.
나는 아직 내 40대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큰 꿈을 꾼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뭐 어떠랴. 마흔에 새로 시작한다는 것이 설레고 두근거리기보다 두렵고 어려운 나이지만, 좋게 보면 마흔은 진짜 내 삶의 주인공으로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일지 모른다.
이 글은 인생의 전환점에 선 후에야 시작된 내 치열한 고민의 흔적이다.
마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히 삶의 이정표를 그리고, 꿈을 이루기 위해 미친 듯이 집중하고 싶어진 나이.
아직은 꿈을 꿔도 좋을 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