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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필사 6일째

우연히 필사

by 감정 PD 푸른뮤즈

우연히 필사 6일째.


따스한 봄날, 오랜만에 연락이 뜸했던 친구를 만났다.

동네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그동안 쌓인 이야기들을 풀어놓았다.

살랑이는 봄바람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었지만, 장장 3시간의 수다로 만족하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깐 쉰다는 게, 까무룩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뜨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떠오른 생각,


'나 오늘 한 게 없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 같아서 허전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필사 노트를 펼쳤다.

매일 필사를 하니 적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은 아니다.

생산적인 일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내게, 필사는 좋은 변명거리가 된다.


오늘은 필사에 변화를 준 날.


늘 쓰던 펜이 있었다. 부드럽게 써지는 느낌이 좋아 그 펜만 고집했다.

그런데 오늘은 문득 연필로 쓰고 싶어졌다.

연필을 좋아해 수집까지 하지만, 정작 마지막으로 써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방치된 연필 하나를 꺼내 연필깎이로 천천히 깎았다.

뾰족하고 단정하게, 마치 처음 쓰는 연필처럼.


사각, 사각—


'사각사각'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거칠고 투박한 소리가 났다.

연필심이 조금 닳을 때마다 곧바로 다시 깎았다.

뾰족한 상태로 쓰는 맛을 즐긴다.

작은 사치다.


연필로 쓰니 필사의 속도가 느려졌다. 그 느림이 좋았다. 오히려 필사에 더 잘 맞는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연필심의 감촉, 사각거리는 소리,

아날로그가 주는 신선함이다.

언제부터 연필과 연필깎이가 이렇게 낯설어진 걸까.


필사 자체에 목적을 두니, 방식도 자유롭다.

펜이든, 연필이든, 어떤 도구를 쓰든 상관없다.

얼마나 다양한 방식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중에서 ‘나만 즐거운 방법’을 찾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평온한 행복.


오늘 필사하다가 마음에 남은 시.


류시화, <슬픔에게 안부를 묻다>


너였구나

나무 뒤에 숨어 있던 것이

인기척에 부스럭거려 여우처럼 나를 놀라게 하는 것이

슬픔, 너였구나

나는 이 길을 조용히 지나가려 했었다

날이 저물기 전에

서둘러 이 겨울 숲을 떠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를 깨우고 말았다

내가 탄 말도 놀라서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숲 사이 작은 강물도 울음을 죽이고

잎들은 낮은 곳으로 모인다

여기 많은 것들이 사라졌지만

또 그대로인 것이 있다

한때 이곳에 울려 퍼지던 메아리의 주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무들 사이를 오가는 흰 새의 날개 같던

그 눈부심은

박수치며 날아오르던 그 세월들은

너였구나

이 길 처음부터 나를 따라오던 것이

서리 묻은 나뭇가지 흔들어 까마귀처럼 놀라게 하는 것이

너였구나

나는 그냥 지나가려 했었다

서둘러 말을 타고 겨울 숲과 작별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만 너에게 들키고 말았구나

슬픔, 너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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