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우연히, 필사 21일째.
오늘 필사는,
내가 좋아하는 문장을 찾아 썼다.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 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믿지 않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이기주, <언어의 온도>
외로운 이유
혼자서 너무 많은 사람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느라 지쳤기 때문에
내가 내 감정에 솔직하기 못하기 때문에
나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 별로이기에
내가 사람들과 잘 못 어울린다 생각하기에
누군가 다가오면 거리를 두고 나도 어느 이상은 늘 다가가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도 계속 사랑받으려 하기 때문에
말하지 않고서 누군가 내 마음을 알아주길 바랄 때
사람은 외로워집니다.
-글배우, <지쳤거나, 좋아하는 게 없거나>
우연히 필사를 시작했다. 기대도, 목표도 없었다. 그냥 해보자는 마음뿐.
사실 '우연히'라고 말하지만, 들여다보면 이유는 분명했다. 당시 나는 독서 권태기를 겪고 있었다.
독서가 낯설어진 건 필사 시작 한 달 전, 2월 달 쯤이었다. 책을 펼치면 글자는 눈에 들어오는데 내용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문장이 아니라 활자만 둥둥 떠다니는 느낌.
마음먹고 책을 펼쳐도 두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었다.
이 책, 저 책 다양하게 시도했다.
잡히는 책이 하나쯤은 있겠지 싶었지만 자꾸만 책을 덮게 됐다. 억지로 붙잡을수록 자괴감만 쌓였다.
왜 갑자기 이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당시 나는 마음이 조급했다.
생각과 고민이 많아진 상황에서 독서도 평소와 다른 방향을 향해 있었다. 읽고 싶은 책 보다 읽어야 하는 책 사이에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내가 지금 이 책을 읽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하며 채찍질을 했다. 즐거움보다 목적이 앞선 독서.
그렇게 '즐겁게 읽는 법'을 잃어가고 있었다.
책을 참 좋아했다.
고민이 생길 때마다 해결해 줄 조언을 찾아 책으로 파고들었고, 힘들 때 나를 토닥여줄 책을 찾아 의지했다.
책은 도피처이자 인생 참고서였다.
그런 내가, 책과 멀어졌다.
글자를 읽는 눈과 내용을 받아들이는 마음 사이 보이지 않는 틈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필사를 시작했다.
크게 다짐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뭔가라도 해보자는 마음.
읽는 게 안되니 쓰는 걸 해보자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기하게도 필사를 하면서 조금씩 다시 읽을 수 있었다. 시작은 소설 <아리랑>이었다.
다른 소설은 눈에 잘 안 들어와도 그나마 조금씩 읽히던 책이었다. 그날따라 '재밌다'라며 한참을 읽었다.
아리랑 8권을 완독하고 뒤 내용이 궁금해 9권을 펼치는 순간 깨달았다.
독서 권태기가 사라졌구나.
그날을 계기로 다른 책들도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
분야 상관없이 잘 읽혔다.
다시 몰입되는 그 감각이 반가웠다.
그렇게 필사 15일쯤 되었을 무렵, 나도 모르게 독서 권태기가 사라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사가 꽤 괜찮은 대안이었구나 싶다.
글을 옮겨 적는다는 건 결국 문장을 읽고 쓰는 받아들이는 행위니까.
꾸준히 쓰는 동시에 다시 읽는 연습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젠 마음껏 책을 읽는다.
그동안 읽지 못한 만큼 더 열심히 읽는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책만 읽고 싶다.
하루쯤은 그런 날을 만들어볼까 생각 중이다.
이젠 안심이다.
언제 또다시 독서가 막히는 날이 오더라도 필사로 돌아가면 되니까. 그렇게 나는 '읽는 마음을 잃지 않는 치료방법' 하나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