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우연히 필사 22일째.
봄이 왔다. 풀 냄새에도 봄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비 온 뒤 흙과 풀에서 올라오는 짙은 향이, 잠깐 나를 멈춰 세운다.
사계절 중 봄을 가장 사랑하지만, 가끔은 봄이 슬프다.
의욕이 넘치는 만큼 변하지 않는 현실이 더 또렷하게 보여서.
어제는 필사만 하고 기록은 남기지 못했고,
오늘은 필사는 못하고, 기록만 남긴다.
매일은 못하지만 어쨌든 이어간다.
이것도 나름의 꾸준함인가 보다. 다행이다.
어제 적은 문장은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에서 발췌한 것이다.
내 욕망을 명확하게 알고 그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 덜 미안해하며 살았을 것이다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중-
나는 내 욕망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다.
세상에 몇 없는 '내 것'이니까.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어릴 적 꿈. 그게 한 방향이라고 믿었던 게 문제였다.
돌아가는 법도 몰랐고, 그래서 포기가 쉬웠다.
아주 많이 돌아와서야 '옆에도 길이 있었네' 하고 알았다.
나를 이해하지 못한 채,
방향도 모른 채 오래 헤맸다.
돌고 돌아 이제는 안다.
명사로만 꾸는 꿈은 쉽게 무너진다는 것을.
잃어버린 시간 동안 나는 '나'를 너무 미워했다. 진심으로 미워했다.
미워한 만큼 이제라도 제자리를 되돌리고 싶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 여전히 미련은 많지만
그 미련 안에서 조금씩 다시 시작하고 있다.
'너무 늦었다'와 '아직 늦지 않았다' 사이에서 자주 흔들리고, 가끔 지친다.
그래도 '아직 늦지 않았다'에 하루하루 무게를 실어보려 애쓰는 중이다.
아... 봄은 역시 위험하다.
낮엔 풀 향기에 눈길을 뺏기고
밤엔 괜히 감성적이 된다.
그래도 나는 이 감정을 붙들어 기록을 남긴다.
봄이 나를 흔들어도 괜찮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나만 이러고 사는 건 아니겠지>
필사한 문장.
글의 내용이 어둡게 보일지라도, 그 모든 순간에 내가 꿈꾼 건 아름다운 삶이다.
연기하느라 진짜 나를 잊어버린 게 아니라 애초에 진짜 내가 없고 다양한 연기를 하는 내가 뭉쳐져서 '나'가 된다고 믿게 되었다.
모임에 꾸역꾸역 나가는 내가 미련하게 느껴진다. 불편한 걸 알면서도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는 건, 사람들로부터 잊히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잊히고 싶지도 않고, 불편해지고 싶지도 않은 마음, 내가 좋은 것만 취하고 싶은 욕심이다.
내 몸을 지탱하기 위해서는 수분만큼이나 많은 위로가 필요하다.
싫어한다는 건 굉장히 적극적인 감정이다.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자주 떠오르고, 힘을 쏟게 만든다.
견디는 것은 근육처럼 견고해지는 개념이 아니었다.
타인이 준 상처가 아니다. 남 생각하느라 내가 나에게 준 상처다. 나한테 제일 쉬운 사람은 늘 나였다.
관계의 독소가 빠지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나' 일 거다. 타인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맞추는 동안 가장 많이 소외된 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당연하다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관계에 있어서 노력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질의 문제가 아니다.
어른이 되면 자연스럽게 이뤄질 줄 알았던 것들을 알고 보니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획득 가능한 것들이었다.
가끔 유혹은 찾아오지만 영화를 2배속으로 보는 일은 내 삶에 없을 거다. 나는 영화가 사람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속도가 느리다고 보챌 수 없고, 빠르다고 붙잡을 수도 없다. 그저 바라볼 뿐이다. 그 사람의 속도와 리듬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가장 기본적인 예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