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좋은 글을 따라 쓰는 일.
그게 매일 새로울 수 있을까?
필사가 이렇게 지루할 수도 있구나 싶은 날들이 있다.
처음엔 설렘도 있었다. 그런데 그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매일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어보지만, 습관이 되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인내가 필요했다.
아직은 양치질처럼 안 하면 허전한 단계가 아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쓴 적도 많고, 기계처럼 문장을 베껴낸 날도 있다.
좋은 문장을 따라 쓰는 일은 분명 좋은 습관이다. 하지만 그 좋은 습관도 지루함 앞에서는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일까.
오늘처럼 예상치 못한 설렘이 스며든 날은 유난히 특별하게 느껴진다.
친구 집에 놀러 갔던 날, 친구가 말했다.
"책장에 읽는 책 중에 마음 가는 거 있으면 골라가도 돼"
신난 마음에 책을 살펴보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필사노트 책
평소 같았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그날은 달랐다.
"와 필사 책이네"
나도 모르게 반가움을 내뱉고 책을 집었다.
사실 예전엔 필사 책을 왜 따로 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좋은 문장이나 글귀를 옮겨 적는 건 그냥 아무 노트에 해도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필사 책을 사는 건 그냥 비싼 노트를 사는 느낌이었다.
막상 내 손에 한 권 생기니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정확히 뭐가 달라졌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확실한 건 이제는 왜 필사노트를 사는지 알 것 같고, 그것이 낭비라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내 생각의 변화가 스스로도 조금 놀라웠다.
그렇게 내 손에 들어온 필사 노트 한 권.
돌이켜보면 필사를 시작하게 된 것도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도 모두 큰 결심이 아닌 우연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 인생은 계획보다 우연들로 채워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책상에 앉아 노트를 펼치는 순간, 마음이 괜히 들떴다.
'쓰고 싶다'는 마음이 오랜만에 자연스럽게 올라왔다.
표지도 이쁘고, 노트 디자인도 깔끔하다.
어떤 것도 결국 '언제 어떤 마음으로 만나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이 노트는 한동안 멀어졌던 필사의 열기를 다시 피워줬다.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니라, 다시 쓰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작은 시작점이 되었다.
노트를 찬찬히 살펴봤다. 목차가 알차다. (사실 필사 노트 책이 처음이라 비교 기준은 없다.)
왠지 이 노트를 다 채우고 나면, 어휘력이나 표현력이 마구 늘어날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물론 착각이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그 착각을 믿고 싶다.
그만큼 뭔가를 더 받아들이고 싶은 상태라는 게 오히려 반가웠다.
노트의 서문을 펼쳤다.
그중 한 문장에서 시선이 멈췄다.
"필사, 살기 위하여"
처음엔 멋있다고 생각했다. 말맛이 강렬했고 그 울림이 순간적으로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곧 고개를 갸웃했다. '뭐 살기 위해서까지야..'
다소 과장된 말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페이지를 넘기면서 그 문장이 마음에 오래 남았다.
서문은 단순한 안내가 아니라 하나의 짧은 에세이 같았다.
문장 하나로는 와닿지 않았던 의미가 서문의 맥락을 따라가며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휘력이나 문해력의 목적은 단순히 잘 읽고 잘 말하며 잘 쓰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적은 '살기 위해서'입니다. 읽고 말하며 쓰는 것은 우리가 살기 위한 방법입니다. 구체적으로 인생의 다양한 과제와 문제를 예측하고 대비하며 해결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그렇게 했음에도 피할 수 없는 위기나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맞아 쓰러지더라도 무기력이나 절망, 증오에 빠지는 대신 수월히 회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루 한 장 나의 어휘력을 위한 필사노트>, 서문 중에서.
문장에 밑줄을 긋고 따라 썼다.
읽고 말하고 쓰는 것.
그건 단지 표현을 위한 기술이 아니라 삶을 통과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대비하고, 피할 수 없는 아픔을 받아들이며, 다시 회복하기 위한 작고 단단한 연습
저자의 말이 어디선가 내가 느껴왔던 것들과 닿아 있었다. 괜히 마음이 조용해졌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동안 내가 고른 글만 필사해 왔다.
그건 자유롭고 편했다.
마치 미술시간에 자유주제로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반면 필사 노트는 주제가 정해진 백일장 같다.
그 틀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막상 아무 주제도 없이 쓰는 일이 더 어렵게 느껴질 때도 있다.
결국은 자유와 제약 사이를 오가며 그 안에서 조금씩 나를 길들이는 일이다.
필사는 늘 같아 보이지만 때때로 예상치 못한 기쁨이 깃든다.
매번 새로울 수 없다는 것도,
새로움을 계속 바랄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래서일까 불쑥 찾아온 새로움이 더 반갑다.
뜻밖에 받은 노트 한 권으로 마음이 움직였고, 쓰고 싶다는 감정이 다시 피어올랐다.
지루한 반복 속에 스며든 작고 새로운 설렘
그걸 느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필사는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