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필사
요즘 필사 책으로 편하게 필사를 하는 중이다.
매번 직접 필사할 글을 찾을 땐 '무엇을 쓸까? 하며 고르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만큼 추가 에너지가 필요했다.
마침 필사 책이 생겼고, 처음 써본 이 책은 생각보다 편하고 좋았다.
고르는 재미 대신, '오늘은 어떤 문장을 만날까' 하는 작은 기대가 생겼다.
뭐든 장점은 하나씩 있는 법이니까.
그래서 필사 일기는 잠시 멈추고 오롯이 필사에만 집중했다.
허전했지만 오히려 그 가벼움이 마음에 들었다.
비 오는 금요일 밤, 집 앞 도서관에서 열린 <힙한 독서: 표현 채집 편> 강좌를 들었다.
26년 차 독서지도사이자 '바오밥'이라는 이름의 작가님은, 필사 뒤에 생각을 함께 적는 방식을 권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한 번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토요일 아침. '생각도 기록해야지' 되뇌며 펜을 들었다.
필사한 문장은,
권여선 소설 <삼인행>
창밖으로는 사붓사붓 눈이 내리고 방문 틈으로는 아롱아롱 주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적거리던 규가, 젊은 놈 이름은 송용희구만,
하더니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안녕, 주정뱅이>, 창비, 2016, 70쪽
기록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써서일까?
이 날따라 문장이 눈에 꼭꼭 들어왔고, 한 단어가 새삼스럽게 튀었다.
'방문 틈으로는 아롱아롱 주란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익숙해서, 당연히 아는 줄 알았던 단어,
아롱아롱
'아롱아롱은 의태어인데 의성어처럼 썼네?'
느닷없이 든 질문은 꼬리를 물었다.
'아롱아롱 목소리는 어떤 목소리일까?'
'언제 이런 표현을 쓰는 걸까?'
'어물거리는 목소리랑 비슷한 걸까?'
호기심은 하나하나 똬리를 틀었고, 나는 답을 찾아 풀기 시작했다.
사전을 펼치고, '아롱아롱'을 찾았다. 뜻을 확인하고, 예문을 되짚었다.
단어 하나에 이렇게 시간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아롱아롱 사전적 의미: 또렷하지 아니하고 흐리게 아른거리는 모양
예문: 회초리로 치는 것 같은 바람이 아롱아롱 소리를 내며 눈보라를 휘몰아왔다.
사전적 의미만으로 해결이 안 돼서 GPT를 이용했다.
'아롱아롱'은 원래 시각적 이미지를 담은 의태어지만, 문맥에 따라 소리 나 감정, 분위기 등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감각 간 전이'라는 표현 방식으로, 한 감각의 이미지를 다른 감각에 덧입히는 시적 기법이다. '아롱아롱'의 경우, 부드럽고 여리게 퍼지는 시각적 느낌이 목소리의 분위기와 겹쳐지며, 독자에게는 시각과 청각이 섞이는 듯한 몽환적인 인상을 준다. (AI)
새로웠다. 이 날 아롱아롱은 낯선 단어가 됐고, 나는 잘 안다는 착각에서 벗어났다.
익숙한 단어가, 곧 잘 아는 단어는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과정을 겪으며, 마음 한편이 매끄럽게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단어 하나를 중심으로 이렇게 생각이 퍼져나가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평소 필사를 하면서 낯선 표현을 만나도 어색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이미 잘 쓰인 문장이니까.
당연히 좋은 문장이겠거니,
의문은 사치였다
그게 문제였다.
필사는 쓰고 끝나는 게 아니라,
사유의 과정이 필요했다.
좋은 문장을 받아쓰고
익숙한 단어라도 표현방식에 따라 점검해 보고
의미를 곱씹고
질문도 던지고
나만의 답도 찾아보는 것.
어휘력이나 표현력은,
단순 정리하면서 느는 게 아니었다.
낯설게 바라보고 다시 익힐 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이날 변화는 단어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아롱아롱'을 '내 글에 어디 적용해서 써볼 데 없나' 하는 마음으로 이어졌다.
글을 쓴 세월을 통틀어 처음 겪어본마음이었다.
마치 처음 한글을 배우고 어디 아는 단어 없나 하며
간판을 모조리 읽던 유년기처럼.
아직은 어떻게 써먹어야 할지 잘 모르겠고
의미를 100%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이런 사유와 덧붙임의 과정까지가
진짜 필사의 맛이라는 걸 조금은 알 것 같다.
거 참 맛나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