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립커피 한 잔 하려고요

믹스커피 한잔 할래요?

by 감정 PD 푸른뮤즈

드립커피.


나와는 참 먼 이야기였다.

커피가루 위로 천천히 물을 붓고, 그것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향을 느끼는 여유.

내게는 지구에서 화성만큼 먼 다른 세상의 커피였다.


왜 굳이 그렇게 내려먹을까?

그 느릿함이 맛을 더할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난 맛도 잘 모르는데 굳이.."


내 세상은 오직 믹스 커피였다.


믹스커피만이 전부였던 내 커피 세계는,

커피숍을 드나들며 조금씩 넓어졌다.

스타벅스, 탐탐, 커피빈 같은 프랜차이즈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캐러멜 마끼야토를 마시는 사이.

커피란 세계가 조금은 익숙해졌다.


입맛에 맞지 않아 시럽을 세 번이나 넣어 마시던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럽 양은 조금씩 줄었고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 쌉싸름함도 즐길 수 있게 됐다.

보리차 같기도 하고, 조금은 탄 물 같기도 한 그 맛에 적응한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선택지 중 하나일 뿐, 커피에 대한 욕구는 딱히 없었다.


모든 변화는 경험에서 시작된다고 믿는다.

한 번의 좋은 경험이 또 다른 경험을 부르고,

두 번, 세 번 반복되면 그것은 어느새 습관이 되고 취향이 된다.

그렇게 조용히 삶에 스며든다.


2년 전, 해가 길어진 여름날 평소보다 이른 아침을 시작했다.

몸의 움직임이 왠지 하나하나 차분하고 여유로웠다.

여유를 좀 더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옷을 입고 밖으로 나섰다.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러 나가는 길이었다. 평소 빵보다는 밥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그날은 배부름보다 분위기를 즐기고 싶었다.

아메리카노 한잔과 샌드위치.


집으로 돌아와 샌드위치를 담고 좋아하는 방송을 틀었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이겠지만, 나에게는 낯선 아침 식사였다.

혼자 킥킥 웃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나를 대접하는 기분.

그날 느꼈던 만족감은 한참 기억 속에 머물렀다.


비슷한 기분 좋은 아침을 몇 번 더 경험하면서 '커피'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생겼다.

마침 커피머신이 선물도 들어왔고 때론 따듯하게, 차갑게 즐겼다.

막상 캡슐을 다 마시고 나니 고민이 생겼다.

맛이 나쁘지 않았지만 사서 마실만큼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여전히 커피맛을 잘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대신, 새로운 걸 시도해보고 싶었다.

집 앞 작은 커피숍 옆을 스쳐 지나가던 어느 날, '원두판매'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별 관심 없이 지나쳤던 그 간판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렇게, 내 인생 첫 드립커피용 원두를 샀다.

무엇이든, '처음'은 설렌다.

원두를 직접 산 것도 처음이었고, 원두를 어떻게 마실까 고민한 것도 처음이었다.

얼마나 잘 마시게 될지도 모르는데 드립커피세트를 새로 사기보다는 집에 있는 물건을 활용하고 싶었다.

무인양품에서 산 티팟, 쿠팡에서 구입한 계량컵을 꺼내고, 인터넷으로 '칼리타 드리퍼와 여과지'만 주문했다.

(커피숍에 '칼리타' 가 제품이 진열되어 있어서 처음 알게 된 브랜드...그냥 도자기 드리퍼가 있으면 했다)


블랙 드리퍼와 화이트 티팟의 조화.

어울리진 않지만 나름 블랙 앤 화이트다.

사이즈도 마치 짠 듯 딱 맞았다.

계량컵으로 천천히 물을 붓다가, 어느 순간에 빨리 부었다.

남편도 나도 어떻게 내려야 더 맛있는지 잘 모른다.

뭔가 차이가 있는 듯 하지만 아직은 알 수 없다.

천천히, 하나씩 알아가면 되지, 뭐.

물을 붓다가 주변에 튀기도 하고, 식탁에 쏟기도 했다.


"천천히 좀 해봐"

"좀 더 높이 들어봐"


계량컵을 조금 높이 들고 천천히 부어야 하는 요령을 한참 뒤에 깨달았다.

뭐든 하다 보면 실력이 는다. 하하.

그렇게 어설프디 어설픈, 첫 드립커피가 완성됐다.


결과물은...

너무 연했다.

그래도 방안에 퍼지는 커피 향이 너무 좋았다.

맛은..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 왠지 몸의 긴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만든 첫 드립커피라는 사실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이 날 마신 '라틴 아메리카 블렌딩'은 산미가 없다.

처음 마셔봤는데 입맛에 딱 맞았다.


"이 커피 괜찮다. 앞으로 이걸로 살까?"

"아니, 다음엔 다른 것도 마셔보자."


익숙한 걸 좋아하는 나였기에,

스스로 말하고도 놀라운 변화였다.


취향은 양면적이다.


정체성처럼 나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열어두지 않으면 하나의 세계에 갇힌다.


그동안 커피 취향은 단호할 만큼 믹스커피 한 잔 뿐이었다.

하지만 친구의 선물, 감사한 선물이었던 커피머신,

그리고 어느 여름 아침의 여유가 고집스러운 취향에 조용히 틈을 냈다.

그리고 스스로 새로운 커피를 시도하고 싶다는 마음도 생겼다.


고집스럽던 취향도, 이렇게 스며드는 순간들로 조금씩 바뀌어간다.


아직 커피맛은 잘 모르지만,

이 작은 커피 한잔이, 내 일상에 또 다른 '느림'을 가져다줄 수 있을까?

커피라는 건, 맛보다 마음 혹은 분위기로 마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연하고 조용한 커피 한 잔이었지만,

언젠가 더 깊고 진한 커피의 맛을 알아차리는 날이 올까 기대가 된다.

그날이 온다면 지금 이 서툰 한 잔도 내 커피 인생의 한 페이지로 소중히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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