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곤 강을 따라 걷는 길

까미노 아라고녜스 4일차: Ruesta가는 길

by 테우리

Camino Aragones

까미노 아라고녜스, 즉 '아라곤 지방 길'은 피레네 쏭뽀흐 에서 시작해 산맥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을 따라 걷는 길이다.


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들은 모아져 하나의 강을 이루는 데,

이 강의 이름은 Rio Aragon, 바로 아라곤 강이다.


평야지대로 오면 계속 보이는 아라곤 강, 덕분에 쾌적한 느낌이 든다.


까탈루냐, 갈리시아, 바스크, 안달루시아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을 이루는 여러 지역 중의 하나인 아라곤은 과거 아라곤 왕국으로부터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아라곤이라는 단어는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반지의 제왕으로 더 친숙할 듯 싶다.

원래 아라곤 왕국은 중세 스페인 왕국으로 11-18세기에 걸쳐 유지되었으며,

훗날 에스파냐 통일왕국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아라곤 길은 Somport(쏭뽀흐)에서 시작해서 Puente la Reina에서 끝나고 여기서부터 프랑스길과 이어진다.

또한, 아라곤 길은 피레네 산맥 너머 프랑스 아를 지방에서 시작하는 '아를 길(Arles way, Via Tolosana)'과 이어진다.

아를에서 시작해서 Montpellier, Toulouse를 거친 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쏭뽀흐에 도착하게 된다.



*아를 길 경로 참고 링크:

https://www.google.com/maps/d/viewer?mid=z3sbm5-h8DSc.k9xTClTO3exM&hl=en

하늘색이 아를길, 노란색이 까미노 프랑스길이다. 하늘색의 4-5번이 아라곤길



까미노를 걷는 순례길은 유럽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집 문 앞에서 출발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고도 한다.


까미노에서 들은 무용담(?) 중에는 중국인가 인도인가 에서부터 걸어온 사람 이야기도 있었다!

(나보고 한국에서 걸어오면 어떠냐고 했는데 내가 북한 때문에 무리라고 했다.............)



순례의 길의 의미를 떠나서 길 자체가 좋아서 산띠아고로 부터 출발해서 거꾸로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하고

여러 번 와서 올 때마다 다른 의미를 찾는 사람, 개를 데리고 오는 사람, 말을 타고 오는 사람, 별별 사람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역시 유럽의 할아버지들을 보면 자신의 집에서부터 출발하여 자신이 소원하는 순례길의 완성을 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느껴졌다.



Arres에서 Ruesta(루에스타)로 가는 나의 까미노 네 번째 날, 내가 만난 프랑스 할아버지들은 바로 그렇게 까미노를 시작한 사람들이었다!







아레스에서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한 뒤

그 전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산이 바로 끝나는 지점에서 내리막길을 따라 홀로 걸었다.


산 위의 아레스, 이제 멀리 종탑만이 보인다.


그 전날 외로웠던 것보다 훨씬 개운했고

날씨는 이제 맑고 화창하고 전형적인 밀밭과 양귀비가 펼쳐진 초원 길이 펼쳐졌다.


오늘은 전 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식량과 물도 잔뜩 챙겼고

발걸음도 조금은 빠르게 하면서 사진도 간간이 찍고 노래도 부르는 아주 즐거운 까미노가 되었다.




반경 수십 킬로까지 내다 보이는 듯했으나, 아무도 없는 까미노는 여전했다. 이젠 혼자서 걷는 것 자체를 즐기게 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할 일은 많았지만 정작 '오늘' 전심전력하는 일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갈팡질팡했고,

뭔가 해도 대신 못한 다른 일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했다.


여기서는 나는 오늘 정한 목적지까지 걷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빨리, 어디를 들려서, 이런 것들은 정말 부차적인 문제였고,

나는 그 걷기만 집중해서 하면 되는 것이었다.


마음이 얼마나 평온해지고 단순해지는지.


그리고 그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이자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예쁜지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아득히 보이는 피레네의 흰 산줄기들. 저기서부터 걸어 내려온 거라니 나 스스로도 믿기지 않았다. 뿌듯함.
이제 피레네 산맥은 저 멀리에 병풍처럼 걸쳐있고 완연한 평지와 밀밭이 이어졌다


표지판을 확인하고 다시 걷는다. 걷고 걷고 걷는다.



걷다가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으니 아무곳에서나 철푸덕 앉아서 쉰다. 나는 자연인이다아아아아아


말이랑도 인사하기. 말이 살기엔 너무도 좋을 것 같은 스페인광야
리오 아라곤으로 흘러가는 물줄기


아레스에서 루에스타 까지 가는 길의 중간에 알티에다(Artieda)를 제외한 마을에는 알베르게가 없었다. 여닐곱개의 마을이 지도에는 표시되어있어 중간에 빵집 -편의점을 가고 싶지만 있을 리가 만무...- 이나 최소한 카페라도 가고 싶었는데 마을들이 죄다 언덕 꼭대기에 위치해 있었다. 아마 중세시대엔 적들이 쳐들어오는 게 보였기 때문에 그렇게 높이 지었겠지?


보기에는 상당히 예쁘고 사진빨도 잘 받지만 내게는 마치 신기루 오아시스처럼 보였다.




까미노는 그 마을들을 계속 우회해서 들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물 한 병 사려고 길을 이탈해 가기에는 좀 리스크가 있던 게, 여기는 초원 지대라서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 거리는 상당할 것임을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특히 날씨가 구름 한 점 없는 매우 매우 맑음에 다리는 점점 무거워져 갔기 때문에 저 마을에 한번 가면 그대로 방전될 것 같아서 더 그랬다.




전날 아레스를 향해 걷던 산길은 바람이 거세고 구름이 많아 힘들었다면

오늘 까미노는 땡볕에 바람 한점 없어 힘들었다.

그래도 나는 평지가 더 좋더라...

길에 아무도 없으니까 이러고 혼자 논다. 까미노 순례자 걷는 척 설정샷




그렇게 한참을 걷는 데 내 앞에 다른 순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알 할아버지와 걸을 때 인사하고 지나쳤던 프랑스 아저씨였다. 배가 많이 나오고 콧수염을 길러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까미노는 친구 사귀기 매우 좋은 공간이다. 왜냐면 결국 우리는 같은 방향으로 같은 시간 동안 같이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계속 같이 있는 거 대화를 하면 더 좋지 않겠는가?


만약 까미노에 갈 거라면 영어를 꼭 배우는 것을 강추한다. 실제로 나중에 만난 이탈리아 아저씨는 오로지 까미노에서 사람들과 대화하기 위해서 영어학원을 다녔다고 한다.





나를 기억하고 있어줬던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영어를 아주 잘하는 프랑스 아저씨 이름은 Jean-Luc(장 뤽)이라고 했다. 음, 발음이 어렵군.


왜 예전에 나를 봤을 때 인사를 안했냐고 물었더니 내가 알 할아버지랑 같이 있는 걸 보고 스페인 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음, 나는 그러니까 동양인처럼 생겼잖아요!"

하는 나의 대답에 오히려 눈썹을 치켜뜨면서 의아해하던 쟝, "생긴 걸로 스페인 사람이 아닌지 어떻게 안담?"


지금도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는 이 대화는 내가 생김새로 인종과 국적을 판단하고 있었다는 걸 확 깨닫는 계기였다. 역시 사람은 겉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게 맞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쟝이 "프랑스에는 아시아 계지만 유럽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많고, 유럽 각지에 그런 사람들이 많으니 나는 생김새로 판단하진 않았지. 다만 네가 스페인 사람이랑 대화하니까 스페인 사람인 줄 알았어" 하고 덧붙였다.



본인은 스페인어를 잘 못해서 말을 못 걸었다고.

유럽에 배낭을 메고 걸으면서 유럽 사람으로 오해받기는 참 신기한 경험이다.


쟝 아저씨는 아주 오픈마인드에 긍정적인 성격이었다.

3일 동안 대화 없이 혼자 걸었다고 하는데, 나와의 대화에 생기를 되찾으신 듯했다.


"나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라 한국인이에요"

"아 한국! 최근에 IT 쪽에서 눈부신 발전을 했었지, 내가 예전부터 지켜봤는데 놀라워"

하는 반응이 또 신기해서 물어보니 유럽의 백색가전 업체에서 일평생 해외영업을 하셨다고 한다. 지금은 은퇴해서 까미노를 걷고 있지만 아마 자신이 200개국은 다녀본 거 같다고 했다.


언어도 4개 국어를 하고, 아니 5개 국어인가? 지금은 스페인어를 더 공부하려고 종이 사전을 들고 다니면서 까미노에서 연습한다며 보여주었다. (짐도 엄청 무거울 텐데.....!)


짧은 반바지에 흰 모자, 쟝뤽은 매우 유쾌하고 시원시원해서 까미노가 즐거워졌다.


내가 어떻게 까미노를 오게 되었는지, 나의 고민은 무엇인지 얘기하니

자기도 딸이 하나 있는데 삼십대고 프랑스에서 직장을 다니는데 그 딸도 직장을 옮기고 싶어 고민이란다.


그리고 내가 해외에 다니는 일을 원한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라고 격려도 해주었다.

대체 어떻게 5개 국어를 할 수 있냐는 질문에는 계속 공부하다 보면 '스위치가 켜지고 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는데 자기가 생각하기엔 누구나 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무엇보다 본인이 즐겁게 배우고 또 사전을 들고 다닐 만큼 적극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쟝 덕분에 까미노가 생기가 넘치게 되었다.

내가 일평생 언제 또 프랑스 아저씨에게 진로 상담을 받을 수 있겠는가.


내가 이렇게 살면 참 좋겠다-하는 삶을 이미 60년 넘게 살은 사람과 함께 길을 걷는 것은

정말이지 멋진 경험이다. 게다가 그 사람이 나와 비슷한 딸이 있다면 더더욱.



까미노는 혼자 걸어도 그 길 자체가 현자처럼 나에게 인생이란 길을 걷는데 필요한 조언을 주는데,

아라곤 길에서는 진짜 인생의 길을 반 이상 걸은 인생 선배들이 하루하루 이어져 나에게 오기 때문에 더욱 가치 있게 느껴졌다.



평지는 숲으로 이어졌고 쟝 말로는 이제 거의 다 온 듯했다.

그러다 숲이 돌연 끝나고 확 트인 경치가 펼쳐졌다.

Embalse de Yesa, 우리말로 Yesa저수지. 물 색깔이 환상적이다.

숲 너머에는 아라곤 강이 모아진 저수지가 있었다.

그 하늘빛, 에메랄드빛

갑자기 난 여기 오길 정말 잘했다고, 이 곳에 이렇게 있을 수 있어서,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잠시 멈춰 눈앞의 풍경을 감상했다. 일주일 전 한국에서 있던 나는 꿈도 못 꿀 하루를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내 옆에는 쟝이 있었고 나에겐 오늘 갈 목적지가 있었고 하늘은 파랗고 호수는 아름다웠다. 나는 그 시간들에 매우 만족했다.




200여 개국에 다녀온 쟝의 이야기는 매우 재밌었다.

인도 사람들과 회의하면서 빡치게 된 이야기를 들을 때쯤 우리는 루에스타(Ruesta)에 도착했다.


거기도 알베르게가 한 개뿐이지만, 더 북적거리고 아늑했다.

바로 식당으로 안내받았는데, 거기에 어제 함께 아레스에서 밥을 먹었던 사람들이 거의 모두 앉아있었다.




나는 분명 그 사람들이 다 '외국인'이니까 다 스페인 사람일 줄 알았는데,

쟝이 반갑게 인사하는 할아버지는 알고 보니 프랑스 사람이었다!


쟝이 통역해주기를 불어밖에 못해서 아무와도 대화하지 못한 채 아를 길을 걸어 여기까지 온 Pierre(피에르)라고 했다. 나를 어제 보고 오늘 또 봐서 매우 반갑다고 했다.


원래 타지에서 가게 되면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한테 동지애가 느껴지고 더 가깝게 느껴지게 된다. 그 식당의 우리 셋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스페니쉬라서 우리 셋이 더 친해진 걸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나머지 까미노를 함께 걷게 된 피에르와 쟝을 여기서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루에스타에서 까미노 네 번째 날을 마무리했다.



까미노 아라고녜스 4일

: Arres(아레스) -> Ruesta(루에스타)



ps. 갑자기 호수 같은 것이 보이면 이제 거의 다 온 것이다. 중간에 숲길은 그늘져서 걷기 매우 좋음. 그 전까지는 평지를 오래 걸어야 함. 평지기 때문에 28.7km여도 하루 안에 주파하기에 무리 없다.


루에스타 입구, 나는 폐허인줄.....
아라곤 길에 있는 숙소들은 대개 이런 '폐허'같은 곳에 있다. 만약 폐허를 만난다면 길을 잘못든 것이 아니다. 맞게 온 거다.





산구에사(Sanguesa)로 가는 까미노 다섯 번째 날, 이 날부터 나는 함께 걷는 즐거움을 배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나의 길, 나의 까미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