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아질수록 무거운
내가 의사가 됐을 수도 있다는 선생님 말씀이 떠오른다.
어릴 때 나를 정말 아끼던 훈장님은 내가 서울대 갈 거라고 했었다.
30대 후반인 지금, 서울대생도, 의사도 전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연령 소득평균 미만의 최저시급에 준하는 월소득을 받으며 결혼도, 집도 없이 살아가고 있는 평균 이하의 삶이다.
기회가 닿아 이 나이에 K-WAIS-IV으로 지능검사를 제대로 받게 되었다. 30대 초에 야매로 받았을 때 131이 나왔어서 은근 긴장됐다. 이제 뇌의 두 번째 노화시기를 지나버렸는데 엄청 떨어졌으면 어쩌지ㅠㅠ하면서. 높은 지능에 대해서 많이 데여왔으면서도 또 높은걸 못 놓겠나 보다. 뭐에 데였는지는 후술.
웬걸. 제대로 받으니 더 높아져버렸다. 표준편차 15에 3σ 경계이니. 검사자 선생님께서는 자만할 필요는 없다고 하셨다. 원래 지능이 어느 정도 우수했을 거고, 다만 동일 연령대와 비교하기 때문에 20대 때의 145랑은 다르다, 인구 전체로 보면 기초학력도 받지 못한 사람도 많고, 계속 공부하는 사람의 뇌는 '언어영역'같은 면에서 발달하면서 고지능자로 나오게 된다셨다. 사실 예전에 나를 검사해 준 분도 130이었어서 놀랍지 않음. 가방끈이 길어지면 얻는 혜택인가 싶었음.
그럼에도 어쨌든 예상보다 높은 결과를 보고 눈물이 났다. 기쁨? 아니다.
나의 가보지 못한 가능성의 세계들 속의 내가 떠올려졌다.
나의 잠재력을 다 펼쳤다면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따뜻하고 날 지지해 주는 부모님, 나의 재능을 기뻐해주고 더 나은 세계로의 지평을 열어주는 부모님이었다면 나는 더 넓은 세상에서 맘껏 뛰노는 즐거운 아이 같은 삶을 살았을까?
걱정 없이 탐구하고 탐색하며 살았을까.
아이큐가 높으나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의 삶은 외롭다.
살면서 누군가와 대화가 잘 통한다는 느낌이 거의 없고
주변사람들의 삶은
소통되지 않은 무수한 생각들 속에서 내게 관심 없는 것들로 채워져 있어 보인다.
지금에야 그런 것들이 소소한 연결감을 주기에 필요하다는 걸 이해하지만, 10-20대 때는 TV도 안 보고 내가 좋아하는 거만 하려는 똥고집이 더 심했던 거 같다. 솔직히 예능은 아직도 보는 게 힘들다. 드라마나 가끔..
학창 시절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를 좋아했다.
부모보다 잘 나가는 자식이
결국은 부모 손에 죽어 자기 날개로 날아보지도 못하는 설화. 조상님들은 정말 지혜로우시다.
40을 앞두고 있는데도 오늘 저녁 밥상머리에서
엄마가 가장 기뻤던 순간은
내가 중1 첫 중간고사에서 반 1등을 했을 때라더라.
나도 몰랐네.
내가 그랬는지, 엄마가 그걸 그리 기쁘게 여겼는지도.
심지어 대학은 엄마 성에 안 찬 모양이다. 언급도 안 하시더라.
중1 때 성적이 중요한데 다른 공부에 혈안이 된 엄마들 애들은 잘 안 나왔는데 우리 애는 별거시키지도 않고 1등이다. 이게 포인트다 항상.
예전엔 나도 그게 자랑스러웠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서울의 좋은 가정의 부모 밑에서 컸다면 정말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성취할 수 있지 않았을까? 미안 엄마. 난 결국 부모 탓을 하게 돼.
하다못해 방임해 줬더라면.
매사에 건건히 비난하고 평가하고 모자란 놈이라고 하지 않아 줬더라면 내가 내 머리 써먹을 길을 알아서 찾지 않았을까?
검사결과에서 지능은 최상위인데
성격 발달이나 기질 민감성은 최악.
만약 좀 달랐더라면, 내가 내 날개로 날 수 있었을까. 그런 나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런 생각에 결과지를 받고 펑펑 울었다.
지금의 나는 그 숫자가 주는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워서.
솔직히 부모님께 말씀드릴 생각도 안 든다.
분명 머리 좋은 거 다 소용없네, 헛똑똑이네 하는 소리 들을게 뻔하니까.
부모에게 시기질투를 받는 자식으로 산다는 건 이런 것이다.
어쩌면 나 스스로가 지능이 높으면 좋은 직업을 갖거나 높은 성취를 해내거나 해야 한다는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한 걸 부모 탓하고 있는 면이 있을 것이다.
내가 가진 것에 비해 결과가 너무 미흡해서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어져서.
그러게 말이다. 아이큐 145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다행인지 인터넷 검색해 보면 고지능자 옆에 예민, 우울증, 답답 이런 키워드가 자동검색어로 뜨고 많은 사람들이 잘 살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서 글을 올린다. 머리가 좋다는 건 '잘 살기'위해 득이 되니까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건데 잘 살지 못하면 그게 뭔 소용인가.
하지만 가장 슬픈 건
외로워서.
울고 또 울었다.
울다 보면 지치고
그러다 보면 가능성의 세계의 나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된다.
어찌 되든 여기 이곳의 내 삶은 지금 나에게 주어진 단 하나뿐이니까. 지금의 내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게 이 생의 유일한 관심사이니까.
가능성들아 안녕.
너넨 참 멋진 삶이야.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가지고 남은 생 동안 최선을 다해볼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거니까.
하지만 내가 잘 살아내면 부모가 했던 것들이 문제가 아닌 걸로 귀결된다는 생각에 나 자신도 망쳐버리고 싶은 충동이 끓어오르기도 한다. 나만 손해인 거 머리로는 아는데.
그래서 나 스스로를 위해서 지금부터라도 잘 살아내 보자 하는 마음과
진짜 다 망쳐버리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지능이 높아도 소용없긴 하다. 결국 인생은 내 감정을 잘 수용해 주고, 내가 충만히 기쁘고, 내가 만족해야 잘 사는 거라서. 그 부분이 꼬여있으면 머리 좋은 게 해결해주진 않는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엔진을 가졌어도 유리창이 막혀있거나, 핸들이 고장 난 차는 목적지로 빠르게 달릴 수 없는 것처럼.
지금의 내가 하는 것들은 유리창을 닦고 핸들을 내 손에 쥐어보는 연습이다. 마구 달리는 건 결국은 고장을 내거나 나 자신도 죽을만한 사고를 치게 된다는 걸 경험으로 배웠다.
결국 어찌 보면 나 똑똑해요 하고 자랑하고 싶은데 부모님도, 친구들도, 동료들에게도 할 수가 없어서, 지금의 초라한 나에게는 너무 무거운 목걸이라서, 그냥 익명의 공간에 푸념 겸 자랑을 해보는 글이다. 잘 타고난 사람이 못 살아가는 건 흔하지만 또 요깃거리가 되기도 하니까. 한편으로는 나와 비슷한 사람들은 어떻게 극복해 내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정말 멘사에라도 가입해야 할까? ㅎㅎㅎ; 나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십분 발휘해서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보고 교류해보고 싶은 갈증이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