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반이 고장 난 배

감정이라는 신호를 믿을 수 없게 되면

by 테우리

나는 자존감이 낮다.

심리검사에도 그렇게 나오고

아마 나를 일상에서 만나 대화해 보면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자존감이 낮다는 건

나 스스로를 내가 믿지 못한다는 것이다.

내가 가장 큰 나의 비난자라는 것이다.


나는 내가 보기에 못마땅해 보이고

내가 보기에 잘못된 것 같고

걱정되고

불안하며

잘못을 저지를 것만 같다.



별로 만족스럽지가 못하다.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 보니 나 스스로가 나에게 주는 신호들을 스스로 믿지 못할 때가 많다.




여기서 신호란 감정이다.


사람의 의사결정은 감정과 이성의 조합으로 이뤄지는데 사실 감정이 되게 큰 역할을 한다.


감정은 뇌와 몸에 새겨진 수없이 많은 경험들의 축적된 결과이다. 말을 할 수 없던 영유아기를 포함해서 말이다.


나의 그 직감들은 무엇이 위험한지, 나에게 싫은 느낌과 고통을 줄 것인지 파악하고 예측하고 신호를 준다.


그래서 자라 보고 놀란 가슴 다시 안 놀라게 솥뚜껑만 봐도 놀라서 도망가게 해 준다.

안전이 가장 최우선이기에 보수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좋고 따르고 싶은 마음도 마찬가지다. 이게 나를 살려왔던 것이니 계속 좇게 되고 도파민 분비를 시켜 그 루트를 강화시킨다.



문제는 내가 자존감이 낮고 괜찮은 나로서 대우받지 못한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보내는 이 모든 신호들을 과연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상당히 골치 아프고 돌아버릴 노릇이다!



이건 마치 배를 몰고 거친 바다를 평생 항해해야 하는 선장이 나침반을 믿을 수가 없는 상태이다.



나침반이 고장 난 건지도 모르겠고,

지금만 맛이 간 건지, 계속 특정 부분에서만 이상해지는지도 알 수가 없다.

아니면 선장이 성질이 이상해서 지멋대로 하려고 나침반을 무시하는 건지도 알 수가 없다.

선장이 나침반을 읽을 줄 아는지도 모르겠다.



돌아버린 선장과 돌아버린 나침반에

배가 아직 침몰 안 한 게 기적인 듯하다.

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이런 고장 난 나침반의 배는 어떻게 살아가느냐.



누군가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뭐라 했을 때, 이게 나를 공격하는 건지, 우호적인 인사인지 헷갈린다.


피해의식인지 진짜 상황이 나쁜지 알 수 없다.


내가 뭔가 화가 나는 데 이게 화를 낼 타이밍이 맞는지 내가 옹졸한 건지 모르겠다.


실수를 저질렀는데 상대방이 날 죽여버리고 싶어질 일인지, 신경도 안 쓸지 알 수가 없다.


행동하고 나서 상대방이 불같이 화를 내는 데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때도 많다.


나의 신호도 못 읽는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기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엔진이 좋고 배가 튼튼해도 어디로 나아가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수평선을 바라보며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사는 맛이 나지 않지, 그냥 나아가는 것뿐이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내가 멈출 수 없으니 말이다.






감정은 내게 평생 어려운 숙제이다.




내가 무엇을 느끼는 지를 처음부터 자유로이 허용해야 내가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테다.


내가 느끼는 것이 적절하다, 타당하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꾸준히 들어야 내 감정을 나도 타당히 여길 수 있게 되는 거였다.


그리고 과한 것들은 과하다고 믿을 만한 사람, 어른으로부터 들어야 스스로도 이게 과하구나 알게 되는 거였다.


반대로 이럴 땐 이런 감정을 느끼는 거라고 일러줘야 그제야 막힌 부분이 뚫리고 감정을 느끼게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이걸 어릴 때 받아가면서 크면 믿을 만한 나침반이 생기고 그걸 따라 스스로 항해하는 사람이 되는 거였다.



나는 이미 생을 1/3 정도 살았으나 이제라도 나침반을 읽는 법을 배워야 남은 생이라도 잘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늦더라도 아예 출발도 못하는 것보다 나으니까.


완주는 못해도 나아가보는 것은 경험해보고 싶으니까.


애초에 인생에 완주라는 게 있겠냐만은.





나의 나침반은 팽팽히 돌아가는 예민함의 극치이지만 나는 눈이 좋으니까.. 읽는 법을 배워서 나아가고 말겠다.



시간이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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