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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 출신 여자 vs 공대 출신 남자

by 자몽


2006년 초,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영어 점수만 따면 끝인데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을 때까지 미루고 또 미뤘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아마도 커트라인에서 몇 점 차이로 붙었던 것 같다. 영어 시험이라는 큰 산 하나를 넘자 이제는 취직을 걱정해야 했다.

마침 대학원을 같이 다녔던 친구가 한 디자인 에이전시에 입사했다. ‘같이 다니자.’는 말 한마디에 나도 따라서 이력서를 냈다. 강남구청역 인근 한 건물 앞, 설레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탁 트인 유리문을 통과하니 무슨 영화에나 나올법한 사무실이 나타났다. 디자인 회사답게 빨간색 로고도 이뻤고, 목재가 그대로 드러나는 파티션은 드라마에서 보던 재미없는 사무실과는 확연히 달랐다. 까만색 천장에서 길게 내려오는 조명은 은은했고, 책상 위마다 개성 넘치는 물건이 즐비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 복장도 자유분방했다.


안내받은 회의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자, 앞에 계신 분이 명함을 내밀었다. 투명한 플라스틱에 빨간색 글씨. 마음에 쏙 들었다. 감각적인 인테리어와 명함에 홀렸다. 여기가 내 자리구나 싶었다.

그렇게 나는 인생 첫 네임텍을 목에 건다. 논리보다는 감각이 판치는 내 첫 회사였다. 거기서 나는 기획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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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전시였기에 다른 회사에서 일을 맡기면 팀이 꾸려졌다. 회사로 출근해 일하는 시간보다 외부에서 다른 회사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이 많았다. 짧으면 한 두 달, 길면 5개월 이상이 걸렸다. ‘하나은행 사이트 개편 프로젝트’도 외부에서 진행된 프로젝트였다. 을지로입구 4번 출구로 나가면 있던 하나은행 지점. 그 건물 어느 층인가 비어있던 공간에 프로젝트 관련된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우리 회사 사람뿐만 아니라 하나은행 직원과 개발과 보안을 담당하는 회사에서도 직원이 파견되었다.


하나은행 건물 바로 옆에는 휴대폰 모양으로 유명한 SK텔레콤 건물이 있었다. 미술학원부터 대학교, 대학원까지 함께 다닌 친구가 그곳에 다니고 있었다. 어느 날 이 친구에게 전화가 오더니, 다짜고짜 소개팅을 하란다. 옆 부서 공대 출신 남자 직원에게 소개팅을 해주기로 했단다. 원하는 이상형을 물어봤을 때 ‘피부가 좋은 사람’이라기에 내 생각이 났다고. 그럴 수 있다. 그때만 해도 피부가 좋았다.


그렇게 느닷없이 내 전화번호가 전해진 그날 저녁, 전화가 한 통 걸려온다. "안녕하세요!" 목소리 한번 호탕하다. 내가 미대 출신이라니 미술관을 갈까 묻는다. 아니, 난 미술관 안 좋아한다. 괜히 미술관 갔다가 해설이라도 해달라면 곤란하다. 아는 게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대신 밥을 먹기로 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을지로 어딘가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친구가 당부한 탓에 평소 입지도 않던 단정한 감색 치마를 입고 나갔다. 좋은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고, 즐겁게 대화도 하고, 조금 걷다가, <각설탕> 영화까지 봤다. 좀처럼 눈물이 없는 나지만 이 영화를 보면서는 많이 울었다. 사람보다는 동물에 감정 이입이 잘 되는 편이었으니까. 그런 이유를 알 턱이 없는 이 남자는 이때 단단히 오해를 한 모양이다. 정확히 일주일 뒤, 우리는 연인이 되었으니 결과적으로 <각설탕>을 고른 것은 탁월한 선택인 셈이다.





적당히 어색하고 적당히 수줍었던 어느 날이었다. 손을 잡고 들어간 스타벅스는 줄이 길었다. 우리 차례가 되었고 이 남자가 주문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당시 술은 종목 가리지 않고 마셔도 커피는 익숙하지 않았다. 커피 종류도 잘 몰랐다. 내 돈으로 커피를 사 먹어본 적도 없다. 그래서 몇 걸음 떨어져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주문받는 여자 표정이 변했다. 당황하고 있었다. 여자가 뭔가 실수라고 했나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 조곤조곤 따지는 그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그것도 친절하게 번호까지 달았다. 첫째, 둘째, 셋째. 그래 이 여자는 세 가지 실수를 했나 보다.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지 저렇게 번호까지 달아서 지적을 해야 한다고?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살면서 누군가 번호를 매기며 말하는 걸 처음 듣는 순간이었다. 당황스러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숫자 세 개만 머릿속을 떠다녔다. 첫째, 둘째, 셋째.


어떻게든 이 상황을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웠다. 직원에게도 미안했다. 살며시 남자 팔을 잡았더니 나를 쳐다본다. 눈빛으로 '그만해...'라고 말했다. 다행히 남자의 지적질이 멈췄다. 어색하게 커피를 받아 든 채로 택시를 잡아 탔다. ‘이 사람을 계속 만나는 게 맞는 건가?’ 머릿속에서 대 혼란이 일어났다. 억지로 웃으려니 어색한 웃음만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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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을 나랑 다르게 살아오던 사람이었다. 내가 그림을 시작했던 초등학생 시절, 이 남자는 코딩을 시작했다. 내가 연필과 붓을 가지고 그림을 그릴 때, 이 남자는 컴퓨터를 가지고 개발을 배웠다. 나는 그렇게 미대에 갔고, 이 남자는 공대에 입학했다. 내 주변에는 예술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 남자 주변에는 숫자와 논리가 중요한 공대생들이 깔려있었다. 나는 대충 느낌으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했지만, 이 남자는 결론부터 간결하게 말하는 게 편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태생부터 달랐기에 다른 길을 선택했던 것일 수도 있다. 내 책상은 늘 정신이 없고, 머릿속도 복잡만 하고 정리가 잘 안 되는 편이다. 그러니 말도 논리 정연하게 나올 턱이 없다. 조목조목 따지기보다는 에둘러서 이야기하는 방식이 편했고, 논리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대하기가 어려웠다. 불편했다. 이케아 가구를 조립할 때도 설명서를 꼼꼼히 읽기보다, 그림으로 대충 그림만 보고 맞춰나갔다. 가끔 거꾸로 꽂기도 하고, 뜯고 다시 해야 하는 일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래, 나는 이런 사람이었고 25년을 ‘이렇게’ 살아왔다. 내 세상에서 논리는 굳이 있을 필요도 없는 부수적인 부분이었다. 그렇게 살아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그런 내가 25년을 ‘저렇게’ 살아온 공대생 남자를 만나, 처음으로 내가 살던 세상을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보게 되었다. 논리가 기본으로 탑재된 그의 세상은 도무지 나와 섞일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종족의 간극을 극복하고 만난 지 9개월 만에 부부가 되었다. 사랑에 눈이 멀면 뭐든지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는 법이니까. 그가 살아온 세상이 내가 살아온 세상과 다르더라도, 기꺼이 내 세상으로 한 발 들어오리라 믿어버리는 법이니까. 안타깝게도 이 간극이 끊임없이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낼 줄도 모르고, 소심한 성격에 기름을 부을 줄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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