팁 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습니다만
미국 식당에서는 밥 잘 먹고 나서 의례 거치는 관문 하나가 있다. 바로 팁이다.
팁을 얼마나 줘야 하지?
18%, 20%, 25%... 아 15%만 주고 싶다.
커스텀으로 누르면 되게 싫어하겠지? 인색한 아시아인처럼 보이려나?
물론 많이 주면 해결된다. 하지만 나름 넉넉하게 팁을 주고 나와도 따라다니는 생각들이 있다.
내가 이만큼이나 줄 만큼 서비스를 받았나?
세금에 팁까지 하니까 이게 다 얼마야.
(애써 웃으며) 아니야, 서버가 기분 좋았으면 됐지 뭐.
어렵다 어려워. 매번 그렇다.
한국이라면 팁 없어도 눈치 주지 않을 텐데. 방긋 웃으며 '감사합니다' 하거나 '너무 맛있었어요' 하면 내 마음이 전해질텐데. 상대방에게 나의 좋은 마음이 스며들 텐데.
하지만 미국에서는 감사의 표시가 곧 돈이다.
서버의 친절한 웃음을 보면서 '아, 팁을 많이 줘야겠군'부터 생각한다. 물이 다 비어도, 손을 여러 번 들어도 오지 않는 서버를 기다리면서도 '이래도 팁은 18% 줘야겠지' 아까운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밥을 먹으면서 돈 생각이 따라다닌다는 이야기다. 불편하게스리. (물론 다 그렇진 않겠지만요)
밥 값이나 싼가? 둘이 가서 30불어치 먹어도 세금에 팁까지 하면 실제로 나가는 건 38불 정도로 금액이 뻥튀기된다. 배달은 또 어떤가. 똑같이 30불어치 음식을 배달시키면 세금과 팁 이외에 서비스 수수료, 배달 수수료가 더 나나기에 실제로는 45불에 육박한 금액을 내야 한다. 그러니 집에서 자꾸 해 먹는 수밖에.
여러 가지 면에서 팁 없는 나라가 참 편하다. 올여름 2주간 일본 여행하면서도 그랬다. 서버와의 미묘한 밀당에 신경 쓰지 않고 밥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환율 덕에 안 그래도 싸게 느껴지는 밥값이, 팁까지 내지 않으니 혜자스럽기 그지없었다. 팁 없이도 서버들은 충분히, 아니 미국보다 더 친절했다.
그건 그렇고,
이런 경우 팁을 얼마나 줘야 할까?
A 초밥집
우리 동네에는 '쿠라(Kura)'라는 일본 회전초밥집이 있다. 캘리포니아 살 때도 있었고, 이번 일본 여행을 갔을 때도 있었으며, 이사 온 휴스턴 있는 프랜차이즈 초밥집이다. 테이블에 있는 구멍에 빈 접시 15개를 집어넣을 때마다 또르르 장난감이 굴러 나오는 덕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여기는 들어가면 키오스크에 이름과 인원을 입력하고, 자리가 나면 빈 곳으로 안내된다. 사실 그 이후에는 직원을 만날 일이 거의 없다. 자리에 있는 키오스크로 물이나 콜라를 주문하면 로봇이 가져다주며, 돌돌돌 지나다니는 초밥 접시는 알아서 꺼내먹으면 된다. 키오스크로 초밥이나 라면 디저트 등을 주문하면 상단에 있는 벨트로 자동 배달된다. (맥주나 뜨거운 차는 직원이 가져다준다)
여기는 우리 5인 가족이 한번 가면 150불가량이 나오는데, 만약 보통의 레스토랑처럼 20% 팁을 주면 30불가량이 추가로 든다는 이야기다. 팁을... 누구한테? 자리 안내한 사람에게? 물 가져다준 로봇에게? 아니면 자리를 치워주는 직원에게? 애매하다.
B 반은 셀프인 레스토랑
우리 동네 몰에는 '디쉬 소사이어티'라는 음식점이 있다. 여기는 주문을 먼저 하는 시스템이다. 메뉴를 집어 들고, 신중히 결정한 후, 줄 서서 주문을 먼저 하면 번호가 쓰여있는 기다란 막대기를 준다. 그걸 들고 원하는 자리에 가서 앉으면 음식을 자리로 가져다준다. 식기류, 냅킨, 물은 손님이 알아서 챙겨 와야 한다. 즉, 서버의 일은 '음식'을 가져다주는 일뿐이며, 내 테이블을 담당하는 서버도 따로 없다. (치우는 건 정리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
서비스를 받고 나서 주는 게 팁 아니었나? 미리 주는 팁은 대체 얼마를 내야 하는 걸까? 단순히 음식을 테이블 위에 놓아주는 걸로 18%는 너무 많은 거 아닌가?
C 동네 커피숍
동네에 한국 사람이 하는 커피숍이 있다. 독특한 커피가 몇 종 있고, 분위기가 좋아서 사람이 꽤 많다. 오전에 가면 자리가 없을 정도다. 여기는 여느 커피숍처럼 계산대 앞에서 주문을 한다. 자, 계산은 했는데 '팁' 선택이라는 작은 산이 남았다. 앞에서 그녀가 빙긋 웃고 있다. 손가락 끝에 고민이 실린다.
커피를 자리로 가져다주지 않는 스타벅스라면 고민하지 않는다. 여기서 내가 고민하는 이유는, 어떤 때는 자리까지 가져다준다는 거다. 팁 여부와 관계없이, 직원이 덜 바쁘면 그런다.
D 미용실이나 마사지샵
얼마 전 오랜만에 미용실에 갔다. 하얀색 머리를 좀 가릴 수 있다는 솜브레를 예약했다. 비용은 400불. 사실 이미 서비스 비용이 포함된 거 아닌가 의심스러웠지만 팁을 안 낼 수는 없었다.
마사지샵도 마찬가지다. 1시간짜리 마사지를 예약하면 꾸벅 졸다가도 문득 떠오른다. 팁은 얼마 줘야 하지? 이 사람은 기본급을 얼마를 받으려나? 한 시간 내내 붙어서 해주는데, 넉넉히 줘야지. 그런 생각들이.
18, 20, 25%가 친절히 쓰여있는 곳은 그 내에서 주면 되지만, 위에 경우는 고민이 된다.
A의 경우, 소량의 팁만 두고 온다. 처음에는 15-20%를 줬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느꼈다.
B의 경우, 15%-18% 정도의 팁을 주고 있다.
C의 경우, 1-2불 정도를 준다. (나는 커피숍에서는 대게 1불을 낸다)
D의 경우, 20% 정도를 팁으로 내고 있다.
사실 미국에서 팁은 단순한 추가 서비스료가 아니다. 안타깝게도 레스토랑에서는 종업원에게 최저 시급인 $2-3불만 지급하며, 때문에 서버에게는 팁이 주요 수입원이다.
저도 미국 식당에서 일을 해봐서
그 마음 압니다만
대학교 3학년, 오하이오에 1년 산 적이 있다. 아빠의 안식년이었고, 우리 가족 네 명은 OSU 근처의 한 아파트 1층 집을 얻었다.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낮에는 학교에서 외국인 친구들과 수업을 듣고(어학연수라는 그거다), 저녁에는 근처 한국 식당에서 일했다. 종업원이 단 둘이었기에 팁 통에 한데 모아두고 반씩 나눠 가졌다.
당시만 해도 현금을 쓰는 사람이 많았다. 매일 저녁 8시에 문을 걸어 잠그고, 홀을 모두 치운 후, 팁이 들어있는 통을 테이블에 좌르르 쏟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카드로 들어온 팁을 정산하고 나면 내 손에 쥐어지는 지폐는 더 늘어났다. 이미 밖은 깜깜해졌고, 고단하긴 했지만 마음만은 가벼웠다. 얼른 집에 가서 자랑하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엄마에게 자랑을 늘어놓고 나면, Money book을 펼쳐 날짜와 금액을 적었다. 매일 늘어나는 돈을 보는 게 재밌었다. 뿌듯했다. 큰 통에 모인 돈만 봐도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후에 대학 등록금으로 쓰일 만큼 꽤 큰돈을 벌었다)
팁. 나도 미국 식당에서 일해봤기에 그 마음 충분히 알지만 여전히 부담스럽고, 불필요한 문화로 느껴지는 건 사실이다. 팁 없이도 충분히 친절한 나라를 경험했으니까, 팁 없어도 서버가 돈을 충분히 가져가는 구조를 경험했으니까. 내 돈 내고 서비스를 받으면서 굳이 압박감을 느끼고 싶지 않으니까.
어쨌든 나는 미국에 살고, 여기서 팁 문화는 피할 수 없다. 한국에서 자란 내가 팁 문화에 적응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지만, 이제는 팁이 단순히 추가 비용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누군가 나를 위해 시간을 쓰고, 몸을 움직여주는 건 감사한 일이고, 여기선 그걸 전하는 수단이 팁인거다. 일종의 매개체랄까?
그러니 숨만 쉬어도 돈이 드는 이곳에서, 나는 오늘도 나를 위해 움직여준 누군가에게 작은 감사의 표시로 지갑을 열 준비를 한다. 그렇게 미국에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