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장 폴 사르트르
철학에는 근본적인 요인이 있다.
그 요인은 바로 시간이다.
-사르트르-
뭐, 철학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는 알맞은 시기가 있겠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 절실하다.
아무 때나 한 사람 붙잡고 개혁, 혁명적으로 두개골을 쪼개 뇌에 글자를 새길 수는 없는 법이다. 단지 그들이 가슴팍을 활짝 열고 심장을 꺼내어줄 때 즈음 그 빈 공간에 급하게 소리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고 해명하기 위한 강연까지 연 걸 보면. 사르트르의 외침은, 그의 실존주의는 아마 이 ‘타이밍’, 불꽃이 최고의 온도를 뽐낼 때, 절반 이상의 유럽인들이 가슴을 열고 심장을 꺼냈을 때 딱 맞춰서 귀에 들려왔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그 가슴팍은 자신들이 연 게 아니라, ‘신의 죽음’이라는 큰 칼로 인해 개복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것이다. 심장만 나와도 충분한데, 철과 화약에 머리가 터지고 간, 내장, 온갖 검붉고, 새빨간 징그런 것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말이다.
신이 옭아매고 있던 인간, 그리고 그것들의 의지를 방목함으로써, 그 뛰놀 수 있는 영역을 우주로 확장함으로, 인류를 승진, 왕좌에 앉혔으므로 ‘오히려 휴머니즘적’이라며.
일단 졸라 ‘장 폴 사르트르’가 휴머니즘적이다, 사람 자체가. 개복된 가슴팍과 배를 움켜잡고 온 사람들이 “아무것도 없어서 저 시꺼먼 우주로 혼자 나가 왕좌를 차지하라”는 명령(실제 그런 명령은 아니지만 듣는 사람은 충분히 그렇게 들릴만하다.)을 듣는다면 두려움에 떨까 봐, 안 그래도 ‘불안’ 그 자체인 생물체들인데. “오히려 좋다며, 오히려 휴머니즘적이라며, 오히려 너네 편이라며,” 친히 강연까지 열어 안심시키다니. 이게 휴머니즘이 아니면 뭐냐.
사르트르 씨의 유명한 대사를 끝으로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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