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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xit May 01. 2022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숭고함

「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괴테


주인공 한탸는 돈키호테입니다. '영원과 무한'도 당해낼 재간이 없는 절대자이며, 폐지와 하수구 냄새가 깊이 밴 자기 생의 창조자입니다. 구역질 나는 역겹고 끈적한 폐지 압축기 옆에선 그가, 확신에 찬 애정으로 가득한 그가, 부러운 것은 왜일까요.



인간만이 비인간적일 권리가 있다 - 한탸



괴테의 문장을 통해 한탸는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고하는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랭보의 말처럼, 정신의 투쟁 역시 여느 전쟁 못지않게 끔찍합니다. 그리스도는 분열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고 했는데, 그의 존재로 세상에 분열이 생겨났다는 것이었습니다. 흐라발은 사고하는 인간의 비인간성 획득에 대한 찬사의 말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닌 다분히 인간적인 치욕을 견디는 것은 정말 비인간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분히 인간적인 일들 때문에 그는 인생의 사랑인 만차를 두 번 잃었습니다. '치욕을 겪고 명예를 지킨다'는 말을 실천하며 그를 떠난 만차. 노자의 이 도덕경 구절을 그는 압축기 아가리에 넣고 분쇄합니다.




비인간적인 인간들은 치욕을 참 많이도 만들어 낸다. 아니, '사고하는' 인간들.



술에 취해 환상의 친구들 좀 만나고, 철학 교수 좀 속여 먹으면서도 그는 붉은색과 터키 옥색의 치마를 입은 집시 여인들의 눈 속에서 희망을 봅니다. '잊혀진 지혜의 희망'을 보고, '천국을 떠올리며 위로받는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을 봅니다. 그래도 되지요. 사고하는 인간들만이 비인간적이니까요.




한탸는 책의 마지막을 보는 폐지 압축공입니다. 그가 사랑하는 것들의 마지막은 왜 이리 힘든지요. 돌연사해 바닥에 녹아내린 삼촌의 마지막도 그는 럼주의 힘으로 싹싹 긁어냅니다. 그가 사랑하는 칸트의 글귀와, 삼촌이 사랑했던 보잘것없지만 소중했던 금속 조각들과 함께, 기막히게 아름답게 장식합니다.




마지막, 추한 것, 힘든 것을 함께 한다는 것. 그리고 사랑하는 작은 미물들로 추함과 고됨을 장식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 그러한 사실이 저를 눈물짓게 하는데, 이러한 쉽지 않은 숭고함, 대견한 숭고함이 제가 이 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한탸의 말을 빌리자면, '행복이라는 불행을 짊어진' 숭고함.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

하늘만이 무위(無爲)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인위(人爲)를 따르는 인간은?








prgressus ad originem. '근원으로의 전진'
regressus ad futurum. '미래로의 후퇴'



한탸의 세상은 양극단을 오가는 '동시성을 띤 왕복운동'의 활기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발을 물고 늘어진 작은 생쥐의 시선에도 '별이 총총한 하늘을 능가하고' 한탸의 영혼에 깃든 '도덕률'을 능가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지하실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를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에게, 그(한탸) 또한 인간적이지 않습니다. 그래도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 존재할 것임을, 그는 믿거나, 혹은, 소망합니다.



부브니의 거대한 압축기는 그를 미미한 존재로 만들고, 책을 혐오한 만차는 큰 사람이 되었다.



책은 우리를 그 어느 곳으로도 데려다주지 못합니다. 사회주의 노동당원 청년들에게서 도망쳐 나와 성당의 관리 책임자에게 책을 선물하는 사소한 기쁨을 맛본 뒤에도, 그를 기다리는 것은 타데우스 (유다 타데오) 성인의 침묵과 손목동맥을 자른 세네카 뿐입니다. 금빛 욕조 속 세네카의 입증은 세네카 스스로와 한탸에게만 유효할 뿐입니다. 정말 비인간적으로 참담한 심경입니다. 그렇게 느끼면 어리석은 걸까요?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적을 두기 마련이다. 
사랑받는 대상은 모두 지상의 천국 한복판에 있다.




사람들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회의주의라고 하던데. 한탸는 사르트르와 카뮈의 멋진 실존주의 문장에 감탄할 줄 아는, 자신의 지하실로 침범해 오는 사회주의 당원들을 끌어안기도 하는 멋진 휴머니즘을 지녔습니다. 그저 그는 '늘 용서를 빌어야 하는' 운명, 자신의 그러한 성격에 대해,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 용서를 빌곤 하던' 인물일 뿐입니다.



목에 칼을 들이대고, 결국 호주머니에서 꺼낸 시를 읊었을 뿐인 남자처럼, 그는 그 외의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을,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이겠지요. 그리고 저는 그러한 한탸의 삶을, 본인의 사랑(책)을 압축기 아가리에 쳐넣는 비인간적 행위를 자행했으나, 본인 또한 그 사랑의 뒤를 따르기만을 바랐던 로맨틱한 삶이라고 기억합니다.



노자의 말처럼, 태어나는 것은 나오는 것이고 죽는 건 들어가는 것이라. 이것이 도(道)를 방편 삼은 회피라고, 합리화라고, 문학적 유희일 뿐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나친 애정을 담아.






#texIt #텍시트 #슬림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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