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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xit May 21. 2022

불행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락하는 자」, 토마스 베른하르트

"산문의 언덕 너머로 조금이라도 이야기가 끼어들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쏘아 죽인다"
- 토마스 베른하르트



만족스러운 언어는 오해이다. 치명적인 언어들만이 우리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주인공)는 몰락하는 자라는 단어를 몰랐지만, 그 관념의 언어를 듣는 순간 자신의 파멸성을 인식하며 실제로 그 단어는 그를 파멸로 몰고 간다. 그 단어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때, 몰락하는 삶은 그저 그의 도구로서, 우스갯소리로서, 본인 주변에서 불행을 창조해내는 수단으로서만 사용되었을 뿐이다.


평생 동경하던 누군가와 한자리를 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야 그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님을 깨달을 때가 있다. 그것은 치명적으로 동경했던 나 자신을 마주할 때도, 그리고 그 치명적인 단어가 우리를 정의할 때도 그렇다. 정확한 언어와 한자리를 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이 나의 속성임을 씁쓸하게 혹은 비통하게 깨닫게 된다.





언어의 치명성을 피해가고자 한다면 우리는 언어에서 벗어난 유일무이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몰락하는 자, 불행만이 행복의 조건이 되며 불행을 빼앗길까 봐 불행해 하는 자는 한없이 나약하다. 이유가 무엇이든 다행인 것은, 어쩌면 “불행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가 그들의 불행을 빼앗을 때 비로소 불행해지기“ 때문이다.


타인과 타국을 향한 증오는 퇴로를 통해 도달하는 반면, 부모나 조국을 향한 증오는 내 피 안에 흐르는 증오, 나를 직접적으로 향하는 희망 없는 불행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작가의 화해 수단으로 보았다 (토마스 베른하르트에게 조국에 대한 증오는 글쓰기의 원동력이 되었다). '나'에 대한 화해. '나'의 증오를 누그러뜨려, 나의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돋아난 살에 상처를 품기 위한 오로지 나만을 위한 화해. 그래서 이 작품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산문이 되었다.









진정으로 불행한 자는 없다, 그러나 두려운 자는 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몰락하는 자들은 막다른 골목형이다. 불행을 창조하며, 실패와 사랑에 빠지고, 그와 함께하는 사람 또한 불행을 강요받는다. 그러면 두려운 자들은 무엇인가? 두려움에 바들바들 떨며 불행한 상태에서도 더 불행해질까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불행을 사랑하는 자들보다도 더 불행하며, 불행을 두려워하는 그 뫼비우스의 띠 속에서 몰락할 수 조차 없는 인간들이 아닌가?     


몰락하는 자들이 나약한 자라면 두려운 자들은 강인한 자에 가깝다. 강인하기 때문에 두려움을 견뎌내는 것이다. 불행한 상태에서도 더 불행해 질까봐 바들바들 떨리는 마음, 펄떡이는 심장 박동을 모두 부여잡고 견딘다. 몰락하는 자들은 본인의 불행을 알지 못하지만 두려운 자들은 파들 파들 떨리는 눈을 하고도 불안을 노려본다. 네가 죽나 내가 죽나!








작중 주인공들이 ‘작곡가 아닌 ‘연주가  것도 의미가 있다.  책은 ‘이상적 예술 아니라, ‘인생의예술에 관한 책이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글을 통해 <>라는 작품을 읽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번역본이 없어 <몰락하는 > 읽었다.




#texit #슬림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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