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영어는 뭐가 다른 건데?
이전 글을 ‘영어 문장의 큐(Q)는 무엇일까?’라는 의문으로 끝맺었다. 대답을 하기 전에 대체 문장이 독자에게 어떤 ‘신호(cue)’를 보낸다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 어떤 언어에서든 우리가 문장을 보고 떠올리는 정보(혹은 의미)의 구조는 상당히 유사하다. ‘누가 어떻다’, ‘무엇이 무엇이다’, ‘누가 무언가를 한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어쨌다’, ‘무엇이 누구로 하여금 어찌어찌 하게 했다’ 등등. 한 가지 예로, “아침에 공원에서 철수가 영희에게 핸드백을 주었다”라는 문장을 접했다고 해 보자. 이 문장이 보내는 모종의 신호 때문에 우리 머릿속에는 다음과 같은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즉 ‘주다’라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사건의 구조는 “주체가 수신자에게 객체를 전달”하는 구조여야 하며 꼭 필요한 요소는 아니지만 “언제” 그리고 “어디서” 발생했는지도 주어진 상황이다. 이제 각 자리에 개별 정보를 집어넣는데, 바로 “철수”라는 주체가 주는 행위를 했고 “핸드백”이라는 객체를 주었으며 “영희”라는 수신자에게 주는 행위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사건이 벌어진 시간은 “아침”이며 벌어진 장소는 “공원”이라는 정보를 인식하게 된다. 어쩌면 당연한 얘기를 왜 이렇게 장황하게 하냐고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깊이 숙고해 보면 이는 정말 놀라운 일이다.
우리는 한국어 문장을 보든 영어 문장을 보든 이런 의미 구조를 머릿속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떠올리게 된다. 또한 구조 안에 존재하는 각각의 의미 공간들이 다 채워져야 우리는 하나의 문장을 사건이나 서술로서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문법을 조금 공부한 사람이라면 이미 묘한 기시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주어, 서술어, 보어, 목적어 같은 문장 성분을 말씀하시는 거죠?” 기특하게도 정답이다. 우리는 문장을 보면서 “아, 얘가 했구나”, “이러저러한 짓을 한 거구나”, “쟤가 당했구나” 같은 정보를 뽑아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문장이란 응당 읽는 사람에게 “얘가 주어예요”, “얘가 서술어예요”, “얘가 목적어예요” 하고 알려 주어야 한다. 다시 말해 큐, 신호를 주어야 한다. 이 신호를 놓치면 우리는 문장 안에 있는 단어나 표현이 주체인지 객체인지 동작인지 배경인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사건 구조 안에 존재하는 빈 공간을 채울 수 없고 결론적으로 문장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반드시 문장이 보내는 큐에 따라 문장을 읽어 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큐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번 시리즈의 타이틀 역시 “Q영어독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므로 문장이란 응당 읽는 사람에게 … 큐, 신호를 주어야 한다.
문장이 보내는 신호가 정말로 중요하다면 분명 모든 문장에는 그러한 신호가 언어적 차원에서 드러나 있을 것이다. 우선 한국어부터 생각해 보자.
아침에 공원에서 철수가 영희에게 핸드백을 주었다.
첫째, 우리가 이 문장을 보고 ‘주는 행위’가 벌어졌다는 사실과 행위의 주체가 “철수”이고 수신자가 “영희”이며 객체가 “핸드백”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중요한 문제니 잠깐 시간을 주겠다. 5, 4, 3, 2, 1, … 0! 바로 ‘조사’ 덕분이다. 한국어에서 ‘조사’란 주로 명사 뒤에 붙어서 해당 명사가 문장 내에서 어떤 역할이나 기능을 하는지 알려 주는 녀석을 가리킨다. 어, “문장 내에서 어떤 역할이나 기능을 하는지 알려 주는” 장치라고? 어딘가 익숙한 말이다. 맞다. 내가 계속 강조했던 ‘큐’를 보내는 녀석인 것이다. ‘-가’, ‘-에게’, ‘-을’이 자신이 붙어 있는 명사(혹은 동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물론 내 글에서는 동사나 형용사 뒤에 붙는 ‘-다’ 역시 서술격 ‘조사’로서 이해하도록 하겠다.)
둘째, 우리가 위의 문장을 보고 사건이 “아침”에 “공원”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중요한 문제니 잠깐…은 됐고 너무 당연해 보이니 바로 가자. 역시 ‘조사’ 덕분이다. ‘-에’가 붙어 있고 ‘-에서’가 붙어 있기 때문에 각각의 명사가 시간과 장소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이 또한 결국 조사 때문이라면 왜 굳이 첫째와 둘째를 구분한 걸까? 나중에 영어와 비교할 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은 첫째로 언급한 조사들과 달리 여기 언급한 조사들은 선택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어떤 의미에서? ‘주다’라는 동사를 기준으로 “철수가”, “영희에게”, “핸드백을”은 하나라도 빠지면 우리 머릿속에 사건을 온전히 그릴 수 없는 반면 “아침에”, “공원에서”는 빠져도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국어에서 ‘조사’란 … 자신이 붙어 있는 명사(혹은 동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셋째, 우리가 위의 한국어 문장을 보고 사건의 구조가 ‘-가 -에게 -을 -하다’꼴임을 이해한 건 무엇 때문일까? 왜냐하면 ‘-에게’는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는 거 아닌가? 혹은 ‘-가 -라고 -하다’ 꼴일 수도 있지 않은가? “에이, 서술어가 ‘주다’라는 동사인데 그럴 리가 없지 않아요?” 맞다, 정답이다. 서술어는 해당 문장이 어떤 사건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주다’라는 동사가 꿰찬 서술어는 반드시 행위자와 수신자와 대상이 필요하다고 신호를 보낸 것이고! (국어 문법에 정통한 분이라면 서술어의 자릿수나 논항 개념이 떠오르실 게다.)
서술어는 해당 문장이 어떤 사건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꼭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할 부분이 있다. 우리는 「네 인생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아니지 않는가? 인간 언어는 선형적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문장을 순서대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서술어는 웬만하면 문장 말미에 위치한다. 사건 구조처럼 중요한 정보를 문장 끝에 가서야 인식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니나 다를까, 어차피 한국어 문장에서는 모든 명사마다 조사가 일일이 붙어서 사건 구조를 대놓고 드러내고 있다. 서술어를 보기도 전에 뼈대가 선명히 보이는 셈이다. 한국어에서 조사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다시 한 번 강조되는 대목이다. 참 친절한 언어야.
그렇다면 영어는 어떨까? 똑같은 예문을 놓고 한 번 비교해 보자.
In the morning, Chul-Su gave Young-Hee a handbag at a park.
한국어 문장과 비교해 봤을 때 차이가 무엇일까? “어순이요!”라고 대답하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들겠지만 50점짜리 대답이다. 논의를 여기까지 전개한 이상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정답을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어렵다면 한 번 위 문장을 ‘제대로’ 직역해 보자.
~에, 아침, 철수, 주었다, 영희, 핸드백, ~에서, 공원.
단지 어순만 바꿔서 최대한 조합한다고 해도…
아침에 공원에서 철수 영희 핸드백 주었다.
어떤 차이가 있는지 이제 확실히 알겠나? 영어 예문에는 ‘조사’가 부족하다. 특히 ‘-가’, ‘-에게’, ‘-을’이 빠져 있다. 그런데 이들은 ‘주다’라는 동사가 반드시 요구하는 필수적인 성분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아무런 신호를 보내 주지 않으면 도대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건가? 하지만 분명 우리는 “Chul-Su gave Young-Hee a handbag”이라는 문장을 (아마도) 쉽게 이해할 것이다. 아무런 장치가 없음에도 “Chul-Su”가 행위자이고 “Young-Hee”가 수신자이며 “a handbag”이 대상임을 뽑아낼 수 있다. 어떻게? 바로 어순 때문이다.
영희에게 주었다 철수가 핸드백을 공원에서 아침에
어차피 매 성분마다 조사를 붙여서 역할을 명시해 주는 한국어는 영어에 비해 어순의 중요성이 비교적 떨어지는 편이다. 예컨대, 바로 위의 한국어 예문은 일반적인 어순은 아니지만 이해는 가능하다.
At a park, A handbag gave Young-Hee, in the morning, Chul-Su.
하지만 영어는 이렇게 순서를 뒤죽박죽 바꾸면 전치사가 붙어 있는 “at a park”와 “in the morning”을 제외하면 누가 누구한테 뭘 준 건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영어는 필수 성분에 조사가 안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치사가 선택적인 성분에 한해서 조사 역할을 대신해 주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전치사는 명사 ‘앞’에 나온다.) 어순이 신호를 보낸다는 말을 바꿔 표현하면 각각의 어구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고 할 수 있다. “Chul-Su”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Young-Hee”가 바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a handbag”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각각 주어, 간접목적어, 직접목적어로 받아들인 것이다. (나중에 더욱 자세히 보겠지만 영어에서는 선택적인 성분마저 어느 정도 자리가 정해져 있다.)
영어는 … 각각의 어구가 차지하고 있는 ‘자리’가 우리에게 신호를 보낸다고 할 수 있다.
아직 한국어와 비교하지 않은 내용이 하나 있다. 영어는 문장의 사건 구조를 뭘 보고 파악해야 할까? 한국어는 조사가 대놓고 답을 알려 준다지만 영어는 필수 성분에 조사가 안 붙어 있다며? 그래서 영어에서는 ‘동사’의 역할이 매우 매우 중요하다. ‘give’라는 동사가 반드시 행위자와 수신자와 객체를 논항으로서 요구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 동사를 보는 순간 우리는 이 문장의 사건 구조가 어떻게 될지 큐를 잡아 내야 한다. 이 때문에 영어에서 서술어의 위치는 한국어의 전형적인 서술어 위치와 상이하다. 주어 바로 다음 자리인 것이다. 서술어가 뒤에 뭘 데려올지 동사를 보고 ‘미리’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사를 보는 순간 우리는 이 문장의 사건 구조가 어떻게 될지 큐를 잡아 내야 한다. … 서술어가 뒤에 뭘 데려올지 동사를 보고 ‘미리’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점을 정리해 보자.
영어에서는 특정 어구가 문장 내에서 어떤 위치에 왔는지가 해당 어구의 역할을 결정한다.
필수적이지 않은 어구의 경우 전치사가 해당 어구의 역할을 알려 주기도 한다.
영어에서는 동사가 뒤에 어떤 성분들을 데려올지 미리 결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