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영어는 뭐가 다른 건데?
영어 문장이 읽는 사람에게 기본적으로 어떤 신호를 보내는지는 서론 1편에서 대략적으로 살펴보았다. 문제는 영어 문장이 늘 “Cheol-Su gave Young-Hee a handbag.” 수준으로 간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사실 어떤 언어에서든 문장은 끝없이 길고 복잡해질 수 있다. 이는 단순히 “잘생긴 철수가 예쁜 영희에게 값비싼 핸드백을 거창하게 주었다”와 같이 단일 형용사나 부사 몇 개가 붙는 정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잘생긴 철수”든 그냥 “철수”든 우리 뇌에는 단 하나의 철수가 떠오를 뿐 큰 부담이 생기지는 않는다. 진짜 문제는 우리가 한 문장에 동사를 몇 개 더 쓰고 싶을 때 발생한다.
정우성만큼 잘생긴 철수는 영희에게 둘의 사랑을 몇 달 더 연장해 줄 값비싼 핸드백을 마치 웬 기사가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듯 주었다.
영희가 가장 좋아하는 짓은 핸드백을 수집하는 것이다.
위의 한국어 문장들은 그 안에 또 작은 문장들이 안겨 있다. 전자는 ‘정우성만큼 잘생기다’, ‘둘의 사랑을 몇 달 더 연장해 주다’, ‘웬 기사가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다’라는 작은 문장이 다른 문장 성분을 꾸미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영희가 가장 좋아하다’, ‘핸드백을 수집하다’라는 작은 문장이 필수 문장 성분 자리(각각 주어와 주격보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작은 문장들은 읽는 사람에게 큰 혼선을 줄 수 있다. 문장 내에서 작은 역할을 맡은 하나의 성분일 뿐인데 진짜 문장이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앞의 문장의 경우 “정우성만큼 잘생긴 철수는 영희에게 둘의 사랑을 몇 달 더 연장해 주-었다?”라고 착각할 수 있다. (물론 정상적인 한국어 화자라면 이 정도로 힘들어 하진 않으리라.)
여기서 어느 정도 눈치를 첸 독자도 있겠지만, 우리가 이 작은 문장을 진짜 문장으로 착각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ㄹ’이 “이 작은 문장은 형용사절이에요!” 하고 신호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작은 문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우성만큼 잘생긴”의 ‘-ㄴ’, “마치 웬 기사가 영주에게 충성을 맹세하듯”의 ‘-듯이’, “영희가 가장 좋아하는 짓”의 ‘-하는 짓’, “핸드백을 수집하는 것”의 ‘-하는 것’이 얘는 진짜 문장이 아니라고 외치고 있다. (영어와 비교하기 쉽도록 편의상 의존명사 ‘짓’이나 ‘것’을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한국어에서는 동사의 활용형이 문장을 문장이 아닌 다른 문장으로 쓰이게 만드는 큐인 셈이다. 그리고 한국어의 조사가 뒤에 붙던 것처럼 이 친구들도 동사의 뒤에 붙는다. 그렇다면 영어는 어떨까?
Cheol-Su, as handsome as Woo-Seong Jeong, gave Young-Hee, like he was some kind of a knight making an oath of loyalty to his lord, an expensive handbag which would extend their love for another few months.
What Young-Hee likes most is to collect handbags.
일단 한국어랑 비슷하게 동사 자체가 변하는 걸 볼 수 있다. “making an oath of loyalty”라든가, “to collect handbags”가 그러하다. 이렇게 동사에 ‘-ing’나 ‘to’가 붙어 있는 녀석들은 ‘준동사’라고 불린다. 동사에 준하지만 동사는 아닌 셈이다. 이러한 준동사는 “얘가 동사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더 이상 서술어로 쓰이지 않아요!”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런데 영어에는 추가적인 장치들이 좀 더 있다. 나는 이 장치들을 가리켜 ‘마커(marker)’라고 부른다. 신호를 보내는 표지판인 셈이다. 예컨대 위의 예문들에서는 여러 전치사에 더불어 “like he was some kind of a knight~”의 ‘like’라는 접속사, “which would extend their love~”의 ‘which’라는 관계사, “What Young-Hee likes most”의 ‘what’이라는 관계사가 마커에 포함된다. 이 마커들은 우리에게 “얘는 문장처럼 보이겠지만 문장이 아니에요!”라는 신호를 보낸다.
준동사는 “얘가 동사 덩어리처럼 보이지만 더 이상 서술어로 쓰이지 않아요!”라는 신호를 보낸다. … 마커들은 우리에게 “얘는 문장처럼 보이겠지만 문장이 아니에요!”라는 신호를 보낸다.
“그럼 뭘로 쓰이는지 알려 줘야지!” 싶을 텐데. 맞다. 해당 어구가 문장 내에서 뭘로 쓰이는지는 물론 (마치 동사가 그랬던 것처럼) 뭘 데려오는지도 결정한다. 따라서 한국어의 어미(동사의 활용형)와 달리 영어의 마커는 자신이 데리고 온 문장의 맨 앞에 위치한다. 준동사 역시 원래는 동사였기 때문에 역시 어구의 앞쪽에 위치한다. 이 경우에도 준동사나 마커가 ‘앞’에 나와서 뒤에 뭘 데려오는지, 뒤에 데리고 오는녀석이 뭘로 쓰일지 ‘미리’ 신호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우리는 like라는 접속사를 보는 순간 이 녀석이 뒤에 문장을 데리고 올 것이며 진짜 문장이 벌어지는 배경이나 이유 등을 설명한다는 것을 미리 이해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뒤에 문장이 나오더라도 실제로는 문장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도 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준동사나 마커가 ‘앞’에 나와서 뒤에 뭘 데려오는지, 뒤에 데리고 오는 녀석이 뭐로 쓰일지 ‘미리’ 신호를 보내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핵심 내용을 요약해 보자.
영어에서는 동사에 특수한 장치가 붙은 준동사가 존재하며, 이 장치는 해당 준동사구가 서술어로 쓰이지 않는다는 신호를 보낸다.
영어에서는 한국어의 어미와 유사한 마커가 존재하며, 이 마커는 뒤에 데려오는 문장이 실제 문장이 아니라 다른 성분으로 쓰인다는 신호를 보낸다.
[번외] 언어가 선형적이라고 독해 순서가 100퍼센트 선형적이진 않다
본문에서 “Cheol-Su, as handsome as Woo-Seong Jeong, gave Young-Hee, like he was some kind of a knight making an oath of loyalty to his lord, an expensive handbag which would extend their love for another few months.” 예문을 분석하면서 ‘like’가 접속사로 쓰였다고 지적했다. 여기서 똑똑하신 분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채셨을 것이다. ‘like’는 동사나 전치사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 잠깐 스포일러를 하겠다. 앞에서부터 순서대로 읽더라도 “like”가 동사로 쓰였을 리는 없음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미 “gave”라는 서술어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동사가 (준동사가 아닌 이상) 함부로 추가될 수는 없다. 하지만 여전히 접속사인지 전치사인지는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뒤에 보이는 주격 인칭대명사 “he”를 보는 순간 “like”가 문장을 데려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순서대로 읽는 것과, 영어는 표지판이 앞에 나와서 미리 신호를 보낸다는 것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결국 뒤를 봐야 앞에 나온 어구의 정체가 명확히 밝혀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