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경 Dec 05. 2017

우는 아이에겐 선물이 없다고?

아마 우리는 모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흔히 <울면 안 돼>로 알려진 캐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애들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요
산타 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잠 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낼 때 장난할 때도/ 산타 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대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리 마을을 오늘 밤에 다녀가신대


우는 애들에게 선물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산타 할아버지에게 "우는" 애들은 "나쁜" 애들이니까.

그런데 우리는 정말 나쁜 애들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울어서 그런 걸까?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막무가내로 투정을 부리면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물론 작사가는 이런 의미로 곡을 썼을 것이다. 동요 특성상 하고 싶은 말을 곧 가사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문제는 작사가의 의도가 아니라 작품이다.


우는 이유가 무엇이든 우는 아이에게 그저 울지 말라고만 말하는 건 그다지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 이유가 적절하지 못하다면 그렇게 타이르면 될 일이 아닌가. 우는 것이 그 자체로 문제 될 리 없다.


아파서 우는 아이에게 굳이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런데 이 캐롤은 단순히 눈물을 보이지 말라는 압박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캐롤은 눈물을 거두라는 말과 함께 슬픔까지도 거두라고 손짓한다. 대개 눈물은 슬픔의 표현이다. 그런데 슬퍼도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랑하는 이를 잃을 때 나오는 눈물은 흘리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흘리기로 한 것이던가? 눈물은 슬픔의 본질인지도. 그렇게 볼 때 울지 말라는 말은 슬프지 말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깟 캐롤 좀 따라 부른다고 감정이 박탈당할까? 그리고 그에 대한 반박도 가능하다. 우리의 감정이 어디 의식 수준에서만 결정되던가?


하지만 이 캐롤이 갖는 영향력의 크고 작음은 중요치 않다. 그보다 이 캐롤을 포함한 문화적 산물들은 언제나 사회의 반영이라는 말을 해야 한다. 남자는 딱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말이 삶의 교훈 인양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전달되는 사회가 이 땅에 있다. 다른 이들의 눈물을 낮추어 보는 것은 차라리 부차적인 문제다. 우리는 어쩌면 우리 자신의 감정으로부터도 소외당하고 있는 건 아닐는지. 울면 안 된다는 외부의 목소리를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는 스스로의 감정을 검열하고 있지 않은지, 그리고 검열을 통과한 감정이 유일하게 나의 것인 양 착각하고 있지 않은지 말이다.


어떤가? 우리도 저 캐롤을 따라 부르던 아이들이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