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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Jan 26. 2018

결과주의의 요구는 정말로 지나친가?

결과주의적 도덕 이론을 위한 변론

A는 콩팥이 둘 다 건강하고, 그중 하나만 있어도 꽤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B는 A의 콩팥 하나를 이식받아야만 살 수 있다. A의 콩팥을 B에게 이식하면 전체적으로 볼 때 더 좋은 결과가 나타나기는 한다. 하지만 이런 결과를 추구하는 것은 곧 A에게 너무나 지나친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도덕의 이름으로 콩팥을 내어주지 않으려는 A에게 콩팥을 내놓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콩팥을 내어줌으로써 A가 치러야 할 비용을 생각해 볼 때 A가 콩팥을 내놓아야 한다는 도덕적 요구는 불합당하거나, 적어도 진정한 도덕적 의무로 성립할 수는 없는 듯하다. 이렇게 볼 때 A에게 B를 위해 콩팥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결과주의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는 오랫동안 이 "지나친 요구에 대한 반론demandingness objection"에 시달려왔다. 결과주의는 도덕적 주체에게 너무나 지나친 요구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도덕 이론이라는 것이다. 가령 더 나은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는 결과를 가져올 수만 있다면 타인 혹은 자신의 목숨까지도 해하라는 요구를 할 수 있지 않은가? 도대체가 제대로 된 도덕 이론이 우리에게 이렇게 지나친 도덕적 요구를 할 수 있는 걸까? 실제로 이 반론은 결과주의적 도덕 이론에 대한 가장 심각한 반론 중 하나다.

그런데 데이비드 소벨David Sobel은 지나친 요구에 대한 반론이 실상 반론으로서의 효력을 갖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지나친 요구에 대한 반론은 결과주의에 대한 반론이 아니라, 그저 결과주의는 올바른 도덕 이론이 아니라는 주장을 다른 방식으로 전개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미 결과주의를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지나친 요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할 수 없다는 게 소벨의 설명이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지나친 요구에 대한 반론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어떤 가정이 필요하다.
그 가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결과주의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지나친 요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논점 선취의 오류를 범한다.


1. 기존 대응


지금까지 결과주의자들은 지나친 요구에 대한 반론의 힘을 인정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대응해왔다.


첫째, 기존의 결과주의는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기 때문에 덜 지나친 요구를 하도록 수정하는 방식이다. 규칙 결과주의rule consequentialism나, 행위자에게 특권적 지위를 부여하는 형태의 결과주의, 행위자를 위한 최저 기준을 보장하는satisficing 형태의 결과주의 등이 등장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둘째, 결과주의의 요구가 지나치다는 점은 인정하되 그것이 문제는 아니라고 말하는 입장이다. 셸리 케이건Shelly Kagan이 이런 전략을 취한다. 물론 결과주의의 도덕적 요구가 도덕에 대한 우리의 직관에 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합리적 근거 없이 그저 직관에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도덕 이론이 거짓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셋째, 결과주의의 도덕적 요구가 지나치다는 생각은 사실 틀렸고 잘 생각해보면 결과주의의 요구가 그렇게 지나치지는 않다는 응답이다. 보통 결과주의가 지지한다고 여겨지는 결론은 사실 결과주의에 의해 지지되는 결론이 아니라는 식의 주장이 여기에 속한다. 가령 1명의 배를 갈라서 그 사람의 장기를 가지고 2명을 살릴 수 있다면, 결과주의는 1명의 배를 가르라고 명령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만, 일부 결과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의사의 트라우마와 살아남은 2명의 죄책감 같은 것들을 모두 계산하면 결과주의자들도 여전히 1명의 배를 갈라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벨이 보기에 이 전략들은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지나친 요구에 대한 반론의 힘을 인정했다는 것.



2. 지나친 요구에 대한 반론이 숨기고 있는 가정


소벨은 묻는다. 비결과주의적 도덕 이론에는 이런 문제가 없는가? 대부분의 비결과주의자들은 A가 B에게 콩팥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때 B가 치러야 할 비용은? A가 결과주의에 따를 때 치러야 할 비용보다 훨씬 크지 않은가? 콩팥 하나를 잃음으로써 겪는 고통은 죽음에 비할 것이 못 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결과주의가  B에게 죽음을 감내하라는 둥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건 이미 우리가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도덕 이론이 감당할 것을 요구하는 비용은 도덕 이론이 방지할 것을 요구하지 않은 비용보다 더 지나친 것"이라는 가정을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그런데 도덕 이론이 치르라고 요구하는 비용과 도덕 이론이 발생하도록 내버려두는 비용 사이의 구분이 도덕적으로 유의미하다고 보는 것은 곧 결과주의가 거짓이라고 보는 것이다. 결과주의는 비용이 얼마나 크고 작은 지를 따질 뿐이니까. 지나친 요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그 반론이 없더라도 이미 결과주의와 결별했을 사람들이다.


도덕 이론이 행위자에게 감당할 것을 요구하는 비용과 방지할 것을 요구하지 않은 비용 사이에 도덕적으로 유의미한 차이가 있음이 논증된다고 하더라도, 그때 결과주의에 대하여 성립하는 반론은 "요구가 지니치다"는 것이 아니라 "요구하는 것과 내버려두는 것 사이의 구분을 무시한다"가 될 것이다.


소벨은 결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반론 중 하나가 이제 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지나친 요구에 대한 반론은 결과주의에 대한 다른 반론이 갖는 힘을 보여주는 유용한 방법일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로서는 무기력할 뿐이라는 것이다.



#윤리학 #결과주의 #지나친_요구에_대한_반론 #규칙_결과주의



David Sobel, "The Impotence of the Demandingness Objection," Philosophers' Imprint 7(8) (2007):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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