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경 Feb 13. 2018

죽음은 나쁜 걸까?

죽음은 바로 그 죽음을 맞이하는 이에게 惡인가? 으레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고통이 아니라 죽음 그 자체도? 그 죽음 뒤에 남겨진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세상을 떠난 바로 그 사람에게? 에피쿠로스Epicurus와 루크레티우스Lucretius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I.

우리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신체가 먼지로 흩어질 때면 감각이 없을 것이고, 감각이 없는 신체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 「주요 가르침」 II

우리에게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善과 惡은 모두 의식을 전제하는 것인데, 죽음이란 곧 의식의 소멸이니 말이야. 그렇다 보니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님을 올바르게 아는 자는 언젠가 끝날 수밖에 없는 삶에서도 만족을 찾게 되지. 삶에 무한한 시간을 더하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불멸을 갈구하지 않기 때문이라네.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部分


죽음은 감각할 수 없다. 죽음이 오면 신체는 감각 기능을 상실하니까. 에피쿠로스「주요 가르침Principal Doctrines「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Menoeceus에서 감각할 수 없는 건 실상 아무것도 아니며, 따라서 죽음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감각할 수 없는 것은 모두 나쁘지 않을까? 통증을 일으키지 않는 병, 여행을 떠난 사이에 집을 태워버린 불, 믿었던 친구의 새빨간 거짓말도 나쁘지 않을까? 단순히 어떤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나쁘지 않다고 (혹은 좋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게 아닐지.



II.

모든 惡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죽음이  우리에겐 아무것도 아니야. 우리가 있을 때는 죽음이 오지 않고, 죽음이 찾아올 땐 우리가 없을 테니까. 그래서 죽음은 살아있는 자에게나 죽은 자에게나 아무것도 아니지. 살아있는 자에게 죽음은 없고, 죽은 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에피쿠로스 「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部分


나쁜 것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나쁘다는 말에 동의할 수 있다면, 그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 이에게는 나쁠 수 없다는 말에도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에피쿠로스는 주장한다. 누군가가 죽는 순간, 그는 부재한다. 죽음이 갖는다는 부정적 가치disvalue를 귀속시킬 주체가 존재하지 않는 한, 죽음이 그 죽음의 당사자에게 나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는 것.

런던에 일어난 재해가 셜록 홈즈에게 나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善과 惡이 반드시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현존을 요청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누군가의 유언을 무시해도 그건 그 사람에게 전혀 나쁜 일이 아닌가? 이미 그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죽은 자는 존재하지 않으나, 허구인 것도 아니다. 죽음은 삶을 전제하지 않는가. 존재한 적이 없는 허구적 인물과 달리 죽은 자는 역사 속에 존재한다. 삶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했고, 이에 기반한 욕망과 이유를 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 삶의 방향과 일치하는 일들이 펼쳐지는 것은 아무래도 그 사람에게 좋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III.

돌아보라,
영원한 시간 중 우리가 태어나기 전
그 먼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자연은 이를 보여주려고 거울을 들어
우리가 죽어 없어질 그 다가오는 시간을 비춘다
자, 무엇이 그토록 끔찍하게 보이는가?
대관절 이 모든 것에 대해 슬퍼할 일이 무엇 있는가?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제3권 部分


죽음은 비존재의 시작이다. 모두가 두려워하는 사라짐.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은 죽음은 나쁜 것이며, 따라서 가능한 한 미루어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On the Nature of Things』를 통해 이런 믿음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태어나기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그 자체로 나쁜 것이라 부르며, 조금 더 일찍 태어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이는 없다. 그런데 왜 유독 죽음에 대해서만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가? 루크레티우스는 삶이 시작되기 이전과 삶이 끝난 이후에 대한 태도가 일관적이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하지만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는 정말로 대칭적일까? 죽음은, 그러니까 죽음으로 시작하는 비존재는 바로 특정한 누군가의 비존재다. 그러나 태어나지 않음으로서의 비존재는 그 누구의 비존재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 누구도 존재한 적이 없으니 말이다. 아무도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어느 누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에피쿠로스와 루크레티우스에게 이 이상의 딴지를 걸고 싶지는 않다. 그들이 전하려던 말은 죽음이 가치론적으로 전혀 나쁘지 않다는 것이라기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느라 삶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에 가까운 것 같기 때문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