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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Feb 07. 2018

평범한 시민의 정의

플라톤의 『국가』와 정의의 문제

플라톤의 『국가』가 말하는 정의로운 이는 오로지 철학자뿐이다. 평범한 시민은 정의롭지 않다. 영혼을 이루는 세 부분인 이성과 기개, 욕망이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에야 비로소 그 영혼의 주인이 정의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성의 힘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많은 플라톤 연구자들이 『국가Republic』에 따르면 철학자를 제외한 시민은 정의justice의 미덕을 갖출 수 없다는 견해를 채택한다. 가령 존 쿠퍼John Cooper는 善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영혼 전체를 다스려야만 비로소 그 영혼이 정의로울 수 있는데, 善에 대한 진정한 지식은 오로지 철학자만 얻을 수 있는 것이므로 대부분의 시민은 정의의 미덕을 함양할 수 없다고 본다. 그런 이상 평범한 시민들은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없다.


안드레아 벨트만Andrea Veltman은 이 주장에 딴지를 건다. 평범한 시민도 정의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영혼에 대한 이성의 통제와 善에 대한 지식을 필요조건으로 삼는 플라톤的 정의platonic justice가 아니더라도 그들에게는 또 다른 정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정의에 대한 참된 믿음과 정의로운 행위를 행하는 습관만 있어도 갖출 수 있는 시민的 정의civic justice다.


평범한 시민의 영혼은 이성이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평범한 시민이 善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플라톤的 정의는 없다. 벨트만은 이걸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평범한 시민이 갖추어야 할 정의가 있음을 내세울 따름이다. 이런 해석은 플라톤의 뜻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그는 철학자가 "평범한 시민적 정의를 (…) 만드는 장인"(500d)의 자리에서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I 국가의 정의, 개인의 정의

『국가』에 따르면 정의로운 국가는 여러 개인이 각자의 본성에 알맞은 역할을 다함으로써 조화를 이루는 국가다. 한편, 정의로운 개인은 영혼의 각 부분이 각각에 알맞은 역할을 다함으로써 조화를 이루는 사람이다.

그런데 국가의 정의는 곧 개인의 정의를 함축하지는 않으며, 그 역도 마찬가지다. 정의로운 국가에 사는 개인이 모두 정의로운 것도 아니고, 정의로운 개인이 살아가는 국가가 죄다 정의로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가령 생산자는 국가 내에서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면서도, 그 영혼이 욕망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 그뿐인가. 정의로운 국가는 오히려 정의롭지 못한 개인을 요청한다. 모두가 철학자의 역할을 자처하는 나라는 정의로울 수 없으니까.


II 평범한 시민의 시민的 정의

그런 점에서 플라톤的 정의는 분명 철학자에게만 허락된다. 그러나 이것이 곧 평범한 시민들이 갖추어야 할 정의의 미덕이 없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벨트만은 이게 플라톤에 대한 보다 정확한 해석이라고 본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에 따르면 정의는 "모든 사람의 행위에 깃드는데, 이것은 그가 어떤 직업을 선택하느냐와는 무관"(325a)하며, "정의로움을 품지 않고서는 (…) 인간이 될 수 없다"(323b-c). 평범한 시민도 인간인 이상 정의로움을 품고 있을 것이란 말이다. 정의와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은 모든 시민들이 똑같이 공유해야 할 덕목이며, 단 한 명의 정의로운 자가 다수의 평범한 자들로 이루어진 국가를 감당할 수는 없다(322c-d)고도 플라톤은 말한다. 『법률Laws』도 철학자가 국가를 통치할 때에는 반드시 시민들이 덕을 함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770d). 평범한 시민들의 정의, 시민的 정의다.


그럼 이 시민的 정의는 대체 무엇인가? 『파이돈Phaedo』은 평범한 시민이 결코 영혼의 순수함을 완전하게 함양할 수 없으며, 따라서 죽음 이후에 참된 것의 영역으로 올라갈 수 없다고 말한다. 단, "철학과 이성의 도움을 받지 않더라도 습관과 관행에 의해" 善을 행한다면 그들도 좋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82b).


그러니 시민的 정의도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일단, 습관 또는 관행으로 정의로운 행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정의로운 행위가 몸에 익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이런 외적 조건external condition만으로는 시민的 정의에 이를 수 없다. 당장 정의로운 행위를 하더라도 막상 낯선 상황에서는 그렇게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모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깊이 각인된 (정의에 대한) 참된 믿음이 필요하다. 이 내적 조건internal condition은 설사 정의로운 행위를 하지 않게끔 만드는 요인이 발생하더라도 다시금 스스로를 다잡고 정의로운 행위를 하도록 만든다. 물론, 이 참된 믿음은 여건에 따라 쉬이 폐기될 수 있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깊이 각인된 믿음이 요청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플라톤은 국가가 음악 및 체육 교육을 통해 시민들에게 정의에 대한 참된 믿음을 깊이 새겨주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마치 천을 염색할 때 소정의 가공 절차를 거쳐서 색이 깊이 스미도록 하는 것처럼.

이들 두 조건은 모두 시민的 정의를 갖추기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각각이 충분조건인 것은 아니다.


III 시민的 정의를 갖춘 자의 영혼

그렇다면 시민적 정의를 갖춘 이들은 질서가 잡힌 영혼을 함양하게 되는가? 아니면 계속적으로 정의로운 행위를 (깊이 각인된 참된 믿음에 근거하여) 행하면서도 철인 통치자가 갖는 것과 같은 정의로운 영혼은 결코 가질 수 없는가?


이 지점에서 둘 중 어떤 식으로 말하더라도 문제가 된다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딜레마에 빠진다는 것.

시민적 정의를 갖춘 이는 질서 잡힌 영혼을 ⓐ함양하거나 ⓑ함양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가 맞다면 이들에 대한 외부의 통제는 불필요할 것이다. 또, 이는 플라톤이 구상하는 국가의 모습과도 맞지 않는다. 대다수의 시민이 질서 잡힌 영혼을 갖게 된다는 것은 곧 그들이 덕의 측면에서 철학자들과 동등해짐을 의미한다. 그런데 모두가 철학자 노릇을 하는 국가는 정의로울 수 없다. 정의로운 국가는 노골적으로 (플라톤的 의미로) 정의로운 영혼을 결여한 시민을 요청한다.

ⓑ도 문제다. 평범한 시민들은 영혼의 조화로움psychic well-adjustment와 행복happiness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결론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게 왜 문제일까? 정의로움은 그 자체로 좋다는 플라톤의 견해가 위협받기 때문이다. 평범한 시민들이 정의를 갖춤으로써 얻는 게 없는데 어떻게 정의로움이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도대체가 평범한 시민이 정의로워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이 딜레마를 어떻게 벗어나갈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방법은 ⓐ와 ⓑ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평범한 시민들은 플라톤的 정의를 아예 함양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함양하는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성의 힘은 (기개와 욕망에 비해) 더 혹은 덜 강해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국가』는 영혼의 세 부분이 각각 다른 정도의 힘을 가질 수는 있지만, 결국은 그 셋 중 어느 하나가 그 전체를 지배한다고 말한다(581c).


벨트만은 ⓑ를 정면으로 돌파한다. 평범한 시민은 정의로운 영혼을 함양하지 않는 게 아니라, 한다. 정의로운 국가는 스스로의 정의로움을 위해 원한다면 정의로움을 갖출 수 있는 개인에게 정의롭지 않을 것을, 그리하여 행복하지 않을 것을 요청하는 게 아니다. 플라톤은 국가의 善을 위해 전사와 생산자 계급에게 善의 포기를 종용하지 않는다. 도리어 국가는 평범한 시민에게 "자연이 허락한 만큼의 행복"(『국가』 421c)를 제공해야 한다.

다만, 평범한 시민에게는 그 행복의 출처가 내부의 영혼이 아닌 외부의 통치에 있을 따름이다. 이성의 통제를 안으로부터 받을 수 없다면, 밖으로부터 받으면 될 일이다.


그렇다면 자네는 언제 천한 정비공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보는가? 오직 그 사람의 가장 훌륭한 부분[이성]이 자연적으로 쇠약해 그 사람 안에 자리한 짐승들[욕망]을 통치하거나 통제할 수 없고, 그저 그 짐승들에 복종하거나 그 짐승들의 비위를 맞추는 법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때가 아니겠는가? (…) 그렇다면 그러한 자가 가장 훌륭한 자[철학자]와 같은 (영혼의) 통치를 받도록, 곧 신성한 통치 원칙을 스스로의 내면에 품은 가장 훌륭한 자의 노예가 되도록 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겠는가? (…) 신성과 지성에 의해 통치받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니 말이야. 물론 그 신성과 지성은 그 사람의 내면에 자리한 바로 그 사람의 것이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바깥에서 비롯되어도 좋지. 그렇게 같은 통치와 지도를 받으니 우리 모두가 최대한 가까워지고 또 친밀해지지 않겠는가?

『국가』 590c-d


평범한 시민들은 국가의 정의를 위해 갖출 수도 있었던 제 영혼의 정의로움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영혼의 정의로움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다. 자연적으로as a matter of nature. 그래서 그들은 국가에 의한 이성적 통치, 외부의 이성external reason 의한 지배를 받는다. 이를 통해 영혼의 조화로움과 행복의 가치를, 그리하여 시민적 덕을 전혀 없거나 부정의한 국가에 사는 평범한 시민보다는 더 좋은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정치_철학 #정의 #고대_철학 #플라톤 #덕_윤리



Andrea Veltman, "The Justice of the Ordinary Citizen in Plato's Republic," Polis 22(1) (2005): 4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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