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경 Jan 18. 2019

플라톤的 이상 국가와 근대 국가

I

플라톤은 이상 국가가 이상적인 인간은 물론, 善과 美를 구현하는 이상적 우주와 구조적으로 유사하다고 본다. 인간의 영혼이 (a) 생존에 필요한 것을 좇는 욕망과 (b) 불의에 대항하는 기개, (c) 무엇이 진정으로 좋은 것인지를 평가하고 욕망과 기개가 도를 넘지 않도록 규제하여 덕을 갖춘 삶을 이끌어 나가는 이성으로 나뉘듯, 국가도 세 가지 다른 기능을 담당하는 세 부분으로 나뉜다는 것. 국가는 (1) 생산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의식주 등 기초적 욕구 충족에 기여하는 생산자와 (2) 나라 안팎의 적들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전사, (3) 진정한 정의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바탕으로 시민들의 삶을 조화롭게 함으로써 그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통치자로 이루어진다.

이성이 과식을 말릴 때 욕망이 말을 듣지 않고 날뛰면 이렇게 된다

인간이 덕을 갖추기 위해서는 욕망과 기개, 이성 각각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정의로운 국가 역시 그 구성원들이 자신이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하되 다른 구성원들의 일에 함부로 참견하지 않아 시민들의 활동이 전체적인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 제대로 된 통치자가 없다면 그 나라는 인간의 기초적인 욕구만을 채우는 데 급급한 "돼지들의 나라"가 되고 만다. 생산자나 전사의 역할도 중요하다. 사람에게 식욕이 없으면 굶어 죽을 것이고, 불의에 맞설 용기가 없으면 찐따 겁쟁이가 되고 말 것이다. 마찬가지로 생산자와 전사가 없는 국가는 유지될 수 없다. 플라톤的 이상 국가에서 불필요한 시민이란 있을 수 없다. 각자의 덕에 알맞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 그럼으로써 국가 전체의 조화를 도모하는 것이 정의로운 국가의 모습이다. 그럼 플라톤의 이상 국가는 근대 국가와 어떻게 다른가?


II

플라톤이 볼 때 인간들은 유한하며 타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인간 같은 건 없다는 것. 자유는 다만 실현되지 않은 잠재성으로만 존재한다. 인간이 짐승보다 우월한 것은 인간에게 고유한 이성을 갈고닦아 그저 본능에만 휘둘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갈고닦음은 당연히 동료 시민들 없이 불가능하다. 훌륭한 정치 없이 생산자는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기 힘들고, 경제 활동 없이 통치자는 굶어야 할 것이다. 철학자도 밥과 고기와 술은 먹고살아야 되지 않겠는가? "국가는 우리가 자족하지 못하는 바람에 많은 걸 결핍하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 같다"는 플라톤의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국가는 이미 자유로운 인간을 위한 게 아니라, 자유를 향해 선 인간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다. 생물학적 인간은 국가보다 시간적으로 앞서겠으나, 진정 자유로운 인간은 국가를 앞설 수 없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플라톤的 국가와 근대 국가는 다른 과제를 부여받는다. 근대 국가는 국가 성립 이전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상정된 개인의 권리와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도구적 성격을 띤다. 가령 홉스는 모두가 자유로이 스스로의 이익을 취하고자 할 경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계약을 통해 국가를 수립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니까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분적으로 제한하는 국가도 궁극적으로는 이를 보장하기 위해서란 것.

그렇다 보니 근대적 개인과 국가 사이에는 항상 긴장감이 흐른다. 가만있으면 힘센 사람들한테 삥 뜯길 것 같으니 경찰과 군대는 필요한데, 세금은 내기 싫지 않은가. 세금은 안 낼수록 좋은데, 세금을 안 내면 무법천지가 될 것이니 하는 수 없이 세우는 게 국가라는 것. 근대 사회에서 국가가 "필요악"이라 불리는 것도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다.

경찰을 부르는 것 말고는 답이 없을까?

반면 플라톤的 이상 국가에게 시민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은 별로 중요한 일이 못 된다. 국가의 역할은 시민들이 범죄 등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시민들을 교육하고 양육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시민들이 덕을 갖추도록 격려함으로써 자유의 실현을 돕는 게 국가의 역할.

근대 국가가 이를테면 투쟁을 감행하려는 시민들의 목덜미를 누르며 (혹은 그렇게 할 능력을 갖추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외적으로 방지하고자 한다면, 플라톤的 이상 국가는 자유를 오남용하지 않는 된 사람을 양성함으로써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가능성을 내적으로 차단한다. 건전한 시민의식을 갖춘 인간들을 길러내는 국가에선 그 시민들 사이에 근본적 갈등 관계가 형성될 일이 없다.


플라톤的 국가의 번영은 시민의 행복은 함께 간다. 국가의 번영은 시민 각자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할 때에 이루어질 수 있으니까. 이때 시민들은 덕을 함양할 수 있지 않은가. 국가와 개인의 이 같은 공생관계가 근대에서 성립하기는 물론 어렵다. 국가의 덩치가 거치면 개인들의 공간은 줄어들게 마련이니까. 근대적 개인은 자신에게 생득적으로 주어진 자유를 최대한 누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 단,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래서인지 근대적 개인은 소심해진다. 특히 나라를 마주할 때.


III

플라톤을 "시대착오적"이라며 까는 사람들이 많다. 2,000년도 훨씬 더 전에 살았던 사람의 국가관을 시대착오적이라 평가한다고 본인이 쿨해지는 건 아니다. 사회와 그 관습 등보다 논리적으로 앞서는 개인을 상정하고서 도덕 철학을 구축해도 되는 걸까? 국가는 언제나 시민과 근원적인 대립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을까? 그런 국가에서 우리는 안정적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의 시작점으로서 플라톤을 읽는 게 차라리 쿨한 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꼰대적 문법의 파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