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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Jan 13. 2019

꼰대적 문법의 파괴

천 번을 흔들리니 어지러워 쓰는 글



아들을 명문대에 입학시키고 싶어 안달이 난 멍멍이는 대학 교수 친구 똘똘이에게 찾아간다. "우리 애 좀 꽂아줘." 하지만 도덕적인 똘똘이는 멍멍이의 부탁을 완곡히 거절한다. "야, 그래도 일은 일이지." 이에 대한 멍멍이의 반응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는 스스로 부끄러운 줄을 깨닫고 똘똘이에게 사과한 후 자리를 뜨거나 똘똘이를 계속해서 설득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멍멍이가 이렇게 반응한다면 어떨까? "나도 알아, A=A 이니까 A가 있는 자리에 뭘 대입해도 그건 참이겠지. 그러니 일은 일이라는 네 말은 맞지. 그건 그렇고 내 아들은 꽂아줄 수 있는 거지?" 병신인가… 분명 멍멍이는 멍멍이 소리를 하고 무언가를 잘못 짚고 있다. 그런데 정확히 무엇이 잘못된 걸까? 멍멍이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A=A란 말도, A의 자리에 무엇을 넣어라도 그 문장은 참일 것이란 말도 모두 맞지 않은가 말이다.


언어가 오로지 무언가를 지칭refer·기술describe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은 어제오늘의 것이 아니다. 가령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어가 실체substance를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이 사과는 맛있다"는 문장의 주어는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빨갛고 주먹만한 과일을 가리킨다는 것. 아리스토텔레스는 단어word와 대상object에서 성립하는 이런 관계가 명제proposition와 사실fact 사이에도 성립한다고 보았던 것 같다. 『형이상학』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그러한 것에 대해 그러하지 않다고, 혹은 그러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러하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며, 그러한 것에 대해 그러하다고, 혹은 그러하지 않은 것에 대해 그러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참이다.

그 사과가 맛이 없는데도 "이 사과는 맛있다"라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사실과의 대응 여부에 따라 명제의 진리값이 결정된다는 진리대응론correspondence theory of truth은 다름 아니라 명제란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란 믿음을 그 바탕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믿음은 고대 그리스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판단은 외부 실재와 일치할 때 참된 것"이라 말한 중세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와 "믿음은 그것에 대응하는 사실이 있을 때 참이며, 그러한 사실이 없을 때는 거짓"이라 말한 현대 논리철학자 버트런드 러셀도 언어란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언어가 세계를 오롯이 담아낼 수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로 다가온다. 가령 러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이 좀 맞아야 한다고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어 자리에 온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없을 땐 그 명제의 진위를 어떻게 판별해야 하는가? "대한민국의 여왕은 미혼이다"는 문장은 참인가? 거짓인가? 대한민국에는 여왕이 있었지만 이제는 없으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러셀은 이게 문제라고 본다. 사실은 언제나 있거나 없을 것이므로, 그 사실을 기술하고자 하는 명제도 반드시 참이거나 거짓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냥 참도 거짓도 아닌 문장이라고 하면 안 되는 걸까?)

러셀은 "대한민국의 여왕은 미혼이다"라는 문장을 "대한민국의 여왕이면서 미혼인 것이 존재한다"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대한민국의 여왕"이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가 대한민국의 여왕이다"라는 술어predicate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자는 것. 러셀의 문제의식은 간단하다. 언어문법적grammatical 구조는 명제와 명제가 기리키고자 하는 사실을 명확히 드러내 주지 못하므로 그 이면에 놓인 논리적logical 구조를 찾아야 한다는 것. 이 세계를 표상하는 것을 본질로 삼는 언어가 문법적 구조에 갇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으니, 그 논리적 구조가 더 투명하게 드러나는 언어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생각. 이 지점에서 형이상학적 실재를 거울처럼 비출 수 있는 이상 언어ideal language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된다. (이걸 "인공 언어artificial language"라 부르기도 하는데, 적확한 용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언어는 인공이 아닌가? 그건 그렇고, 자연과 인공은 어떻게 구분하는 걸까?)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언젠가 일상 언어ordinary language가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는데, 러셀이 품은 문제의식을 공유한 철학자들은 언어에게서 그 외투를 벗겨냈다. 그러면서 직관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은 것 같지만 정확히 무엇이 문제인지는 파악하기 힘들었던 논변이 무너지기도 하고, 심각한 문제라 생각되던 것들이 실은 문제가 아닌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그것은 그것대로 유의미한 성과다.


하지만 일상 언어를 이상 언어로 번역하려는 움직임은 세계에 대한 보다 정확한 기술을 그 지향점으로 삼았고, 그런 움직임 속에서 언어가 갖는 다른 기능은 눈길을 받기 어려웠다.
언어는 그저 묘사하기만 하지 않는다. 겨울날 "창문이 또 열려 있네"라고 말하는 것은 창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기술하는 것이라기보단 추우니 창문을 닫으라고 요구하는 것에 가깝다. 발화는 행위이기도 하다. "넌 진짜 나쁜 놈이야"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이고, "일은 일이지"라고 말하는 것은 청탁을 거절하는 것이다. 언어의 이런 측면을 생각해볼 때 모든 말을 논리학적으로 환원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믿음은 다소 위태로워 보인다.


"컵에 물이 반이나 들어 있나요? 아니면 반밖에 안 들어 있나요?"라는 질문은 (P∨Q 등으로 나타낼 수 있을) "컵의 절반이 물로 채워져 있거나 또는 컵의 절반이 비어 있다"라는 문장이 참인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컵의 상태를 확인한 후에 그것이 명제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판단하여, 해당 문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밝히라는 건 정말 황당한 요구가 될 것이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보통은 "반이나 있네요!"라거나 "반밖에 없네요!"라고 대답한다. (혹은 대답을 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 없이 대화가 진행될 수도 있다.) 저 질문은 인생을 살아가며 가져야 할 낙관적 자세 따위에 대한 썰을 풀기 위해서 던지는 떡밥이고, 우리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 떡밥을 건드려보는 것이다.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질 때는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반응해야 한다는 일종의 사회적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똘똘이가 위와 같은 상황에서 "야, 그래도 일은 일이지"라고 말했을 때 멍멍이가 할 수 있는 적절한 대답은 "에이, 그러지 말고 좀 도와줘"나 "내가 미쳤나 보다, 미안해" 정도가 될 것이다. 언어를 이런 방식으로 쓰는 문화 혹은 관습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 익혀야 할 것은 바로 이런 용법use이다. 언어가 무엇what을 가리키는지가 아니라 어떻게how 쓰이는지. 멍멍이가 "나도 알아, A=A 이니까 A가 있는 자리에 뭘 대입해도 그건 참이겠지. 그러니 일은 일이라는 네 말은 맞지. 그건 그렇고 내 아들은 꽂아줄 수 있는 거지?"라고 짖었던 말했던 건 언어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규칙으로서의 용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렇다면 "컵에 물이 반이나 들어있나요? 아니면 반밖에 안 들어 있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네"라고 대답하는 것은 멍멍이가 그랬듯이 병신 인증일까? 언어의 용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네"라는 이 대답이 "컵의 절반이 물로 채워져 있거나 또는 컵의 절반이 비어 있다"는 문장이 참임을 확인하는 것도 아니다. 이게 컵에 대한 사실 판단을 전하기 위한 건 아니니까.

차라리 이 대답은 언어의 새로운 용법을 도입하기 위한 시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네"라는 대답은 바로 "반이나 있네요!" 따위의 대답을 기대하고, 심지어 때로는 강요하기도 하는 꼰대들에 대한 조롱이 된다. 꼰대들이 우리에게 행사하는 이 압력은 오직 이 질문에 대해서는 "반이나 있네요!" 정도의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규칙 위에서만 가능한데, "네"라는 대답은 바로 이 규칙에 균열을 일으킨다.

그저 기존의 용법이 요구하는 바를 회피하기만 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완전히 생뚱맞은 동문서답도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나 "네"라는 짧은 대답은 기존의 용법을 대체할 수 있었다. 대답을 똑바로 하라는 꼰대의 추가적인 요구에 "왜요? 제가 틀린 말 했나요?"라고 맞받아 칠 수 있지 않은가. 이제 말을 똑바로 하지 않는 것은 내가 아니라 꼰대가 된다. "질문이나 똑바로 해!"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잠언에 대해 이렇게 받아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짤은 기존의 문법을 파괴함으로써 꼰대를 비웃는다. 꼰대를 비웃기 때문에 이것은 첨예하게 정치적이고, 그 작업을 기존의 언어 질서를 교란시킴으로써 해내기 때문에 시적詩的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짤이 저질러 버린 꼰대적 문법의 파괴는 주목할 만한 사건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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