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4시까지 들어와. 어차피 저녁 6시가 되면 만화를 보러 들어갈 것이었는데도 엄마는 이렇게 일러두었다. 엄마 말을 잘 듣는 거라는 뿌듯함으로 늦지 않게 집 근처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를 떠났다. 바닥에 모래가 두텁게 깔린 놀이터였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면 그때도 늦지 않게 들어가고 싶었고, 하늘을 보면서 색깔이 저 정도가 되면 4시쯤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계절마다 해 지는 시간이 다르니까 오후 4시의 하늘 색깔도 늘 달라야 하겠지만, 그날 이후에는 오후 4시가 어김없이 그 색깔이다.
희한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그날이 어떤 계절이었는지, 그러니까 따듯했는지 쌀쌀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시간에서 색깔을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시인에게도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그가 본 하늘에서는 여자가 스스로 입고 있는 치마를 태운다. 독자에겐 똑같은 이야기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같은 여자를 볼 수도 없을 일이다. 그래도 시를 읽고 나면 노을은 더 이상 같은 색일 수 없다. 바라볼 노을도, 바라본 노을도. 당신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는지 궁금하다. 치마가 다 타버리고 나면 여자는 어디에 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