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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경 Apr 14. 2019

오후 4시의 색깔

진은영 - 노을


  하늘이 저기 있다

  입은 채로 자신의 나일론 치마를 불태우는 여자처럼


  벽에 걸린 그림 속에는 전나무의 녹색 바늘, 옥수수알의 노란빛이

  눈을 찌르는 오후가 있다


  불꽃, 너는

  내부에 젖은 눈동자가 달린 동물 하나를 키우고 있다


진은영, 노을 (全文)



  오늘은 4시까지 들어와. 어차피 저녁 6시가 되면 만화를 보러 들어갈 것이었는데도 엄마는 이렇게 일러두었다. 엄마 말을 잘 듣는 거라는 뿌듯함으로 늦지 않게 집 근처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를 떠났다. 바닥에 모래가 두텁게 깔린 놀이터였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면 그때도 늦지 않게 들어가고 싶었고, 하늘을 보면서 색깔이 저 정도가 되면 4시쯤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계절마다 해 지는 시간이 다르니까 오후 4시의 하늘 색깔도 늘 달라야 하겠지만, 그날 이후에는 오후 4시가 어김없이 그 색깔이다.

  희한하게도 혹은 당연하게도 그날이 어떤 계절이었는지, 그러니까 따듯했는지 쌀쌀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시간에서 색깔을 감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시인에게도 이야기가 있을 것이고, 그가 본 하늘에서는 여자가 스스로 입고 있는 치마를 태운다. 독자에겐 똑같은 이야기가 없는 것이고, 그래서 같은 여자를 볼 수도 없을 일이다. 그래도 시를 읽고 나면 노을은 더 이상 같은 색일 수 없다. 바라볼 노을도, 바라본 노을도. 당신의 이야기는 어떻게 끝나는지 궁금하다. 치마가 다 타버리고 나면 여자는 어디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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