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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튤 Sep 24. 2020

단종된 우정

우리 우정은 얄팍했다

크리스는 내가 아르바이트하던 아이스크림 가게의 손님이었다. 십 년 전 가을에 그를 만났다. 크리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나는 온몸이 바짝 긴장됨을 느꼈다. 외국인이 많지 않은 촌도시에서 만난 첫 외국인 손님이었던 탓이다. 그가 계산대 앞까지 왔을 때 나는 고개를 높이 들어 그를 올려봐야 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메이 아이 헬프 유…?”


그는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키가 컸다. 목까지 잠근 녹색 셔츠를 면바지 안에 넣어 입고 그림자처럼 늘어진 남색 코트를 그 위에 걸친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그 모습은 무척이나 고압적으로 느껴졌다. 상대가 위축되어 있는 이 상황이 익숙한지 그가 천천히 영어로 말을 했다(지금 생각해보면 그 정성으로 한국말을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알고 있는 영어 단어를 총동원하여 더듬더듬 주문을 받았는데 그가 내게 엄지를 보이며 그레잇이라고 말했다.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보아서는 발음이 좋다는 의미 같았다. 쑥스러워 서둘러 아이스크림을 담아 내밀었다. 얼른 먹고 나가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그는 창가의 가장 끝자리에 앉아서 천천히 초콜릿 칩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콘 꼬다리를 입에 털어 넣고 손가락까지 빨던 그는 간만의 여유를 즐기러 온 사람 같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바지통을 바짝 줄여 입은 중학생들과 간간이 손인사를 하거나 내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거나 그저 멍 때리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방문해서 초콜릿 칩 아이스크림을 주문했다. 꼭 콘에 담아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결제할 때면 언제나 마그네틱이 손상된 포인트 카드를 내밀었다. 평범한 손님에게라면 낡은 카드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방법을 설명해 주었을 텐데 외국인 손님에게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아이스크림을 조금 더 얹어주었다. 어쩐지 그가 가련해 보인 탓이었다. 적선에 가까운 서비스였음을 알지 못하는 그가 고맙다며 윙크를 날렸다. 그는 정말 자주 방문했다. 꼭 초콜릿 칩 아이스크림을 콘에 담아달라고 했고 역시나 낡은 포인트 카드를 내밀었다.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나는 이 가련한 외국인에게 낡은 카드를 새것으로 교체하는 법을 알려주고 싶어졌다.


마감시간이 가까워지면 손님이 줄었다. 그날도 크리스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창밖을 바라보며 턱을 괸 채 혼자만의 감상에 젖어있었다. 나는 아이스크림이 찌든 바닥을 물걸레질하며 슬금슬금 그에게 다가갔다. 그 앞에서 대걸레를 고쳐 잡고 ‘나는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한 포즈를 지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위축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 원트 체인지 유어 포인트 카드.”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밤 잠들기 전에 작문한 영어 문장을 열심히 읊었는데 전혀 소통이 되지 않았다. 손발을 이용해 허둥지둥 뭔가를 설명하려는 내게 그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냅킨에 이메일 주소를 적어 내밀었다. 하고픈 말을 메일로 보내달라는 의미 같았다. 그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번역기를 돌려가며 메일을 보냈다. 당신의 포인트카드를 새것으로 바꿔줄게요. 포인트는 그대로일 거예요. 답장은 금방 왔다. Ok, Thank you. 이후로도 의사소통이 막힐 때면 그는 이메일을 보내라고 했고 나는 또 열심히 번역기에 의지해 그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아이스크림 냄새가 밴 교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온 날 밤이면 어두운 거실에서는 키보드 두들기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오늘은 초콜릿 칩 아이스크림이 품절이었어요, 사장님께 주문 넣어달라고 이야기할게요, 나는 열여덟 살이에요, 당신은 원어민 교사라고요? 제 꿈은 작가가 되는 거예요, 캐나다에서 왔다니 멋지네요, 소녀시대 ‘Gee’에 빠져있다고요? 저도 그 음악 좋아해요, 아, ‘Gee’와 ‘쥐(Mouse)’의 한국 발음이 똑같아 재미있다고요? 정말 그렇네요.


광고메일로 가득했던 메일함이 그와 나눈 대화로 차곡차곡 쌓여갔다. 우리는 아르바이트생과 손님보다는 이메일 친구가 더 어울리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청주로 이사 가며 얼마 지나지 않아 관계가 소원해졌다. 이메일보다는 문자, 문자보다는 카톡을 더 많이 쓰는 시대가 도래했고, 나는 그에게 카톡 계정 만들기를 권유할 만큼 영어실력이 뛰어나지도, 정성스럽지도 못 했다. 게다가 스무 살은 더 많은 그와 아이스크림 외에 공통사가 없다 보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한국어로도 어려운 대화를 영어로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가 몇 번 안부 메일을 보내왔지만 답장을 기다리는 건 지루한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도 메일 보내기를 시도하지 않았다.


청주에서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일했다. 수많은 외국인 손님이 왔다가는 곳이었지만 모두 스쳐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조금씩 한국말을 할 줄 알아 아르바이트생을 난감하게 하는 일이 없었고 모바일 카드를 사용했기에 마그네틱이 손상되는 일도 없었다. 새로운 환경이 점차 익숙한 곳이 되어갈 즈음 초콜릿 칩 아이스크림이 단종되었다. 그제서야 애써 외면했던 크리스가 떠올랐다. 간간이 느껴지는 오독오독한 식감 때문에 초콜릿 칩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던 사람이었는데. 크리스는 이제 어떤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을까. 가끔씩 그가 생각난다. 그럴 때면 어쩐지 그가 가련해지고 몹시도 미안해지고 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변명하고 싶어진다. 켜켜이 쌓여가는 광고메일 저 아래에 얄팍한 우정을 나눈 메일이 잠들어있다. 그에게 답장을 보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만두었다.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아마 우리의 우정은 초콜릿 칩 아이스크림처럼 사라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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