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라 불리는 것을 거부한 스페인의 패션 프로젝트
크고 작은 브랜드가 우후죽순 생겨나고 소리 없이 사라지는 요즘. 지금이야말로 임팩트 있는 콘셉트로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브랜드의 발자취를 바로 볼 때다. 먼저 소비자의 관점에서 브랜드에 대해 정의해 보자. 아마 많은 이들이 브랜드라 하면 '상표'의 형태를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브랜드를 나타내는 심볼과 로고. 어떤 집합(브랜드)을 정의하는 단어를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집합에게 봐왔던 이미지를 토대로 이어질 장면을 연상하고 기대한다. 구찌의 이미지를 선호하는 이가 매 시즌 컬렉션을 기대하고 소비하는 것처럼. 브랜드는 일관된 소비자 경험을 약속하는 하나의 명사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브랜드로 묶이게 되면 일정 부분 언어의 규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구찌가 특정 아티스트의 아트웍으로 전체 컬렉션을 구성하지 않고, 오프라인 댄스파티를 기획하지 않듯, 브랜드는 아이덴티티 근간을 뒤흔드는 프로젝트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한결같은 톤앤매너와 일관된 소비자 경험을 강조하는 '브랜드'이길 거부한다면 어떤 형태가 될까?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기반으로 다채로운 패션 컬렉션을 전개하는 '팔로마 울(paloma wool)'은 자신들을 브랜드가 아닌, '프로젝트'라 명명하고 있다. '예술과 패션에 대한 실험'이라는 콘셉트 아래 패션, 예술, 온-오프라인 커뮤니티 영역에서 다양한 실험을 지속한다. 담대한 비전만큼이나 이들의 행보는 눈에 띄게 파격적이고, 브랜드라기엔 광범위한 부분을 포괄하고 있다. 2022년 4월 기준 팔로마 울 공식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수는 62만 8천 명. 소셜 미디어에서 가장 사랑받는 패션 레이블 중 하나로 추앙받는다. 브랜드의 성공을 보장한다는, 공식화된 룰을 따르지 않는 팔로마 울은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팔로마 울은 창립자 팔로마 라나의 고유한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라나는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패션 업계의 규격과 사이클에 대해 이해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세일즈 기술과 어머니의 예술 감각을 가까이 살피며, 간접적으로 패션 업계를 학습했던 것이다. 어린 라나는 자연스럽게 자신만의 패션 레이블을 꿈꿨고, 대학을 졸업한 뒤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디자이너이자 포토그래퍼였던 라나는 예술과 패션의 융합에 대해 고민했으며, 규격화된 패션 시장에 반기를 들고 싶어 했다.
2014년 4월에 진행된 팔로마 울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바로 팔로마 라나가 직접 촬영한 사진이 전면에 들어간 스웨트 셔츠였다. 흔히 패션 브랜드에서 시즌 컬렉션을 선보이는 것과는 완벽히 다른 길이었다. 그러나 라나의 스웨트 셔츠는 생각보다 많은 이들의 관심을 이끌어 낼 수 있었고, 다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에 원동력이 되었다. 한 인터뷰에서 라나는 프로젝트 초반을 상기하며, 패션 산업의 규칙과 규정에서 프로젝트를 분리하기로 결정하고 나서야 프로젝트를 어떻게 진행해야 할지 명확히 보였다고 이야기했다.
"사실 저는 옷을 입는 행위가 보편성을 띄면서도 지극히 개인적이라는 점을 사랑합니다. 한계를 뛰어넘고, 자유로운 컬러의 어우러짐을 꿈꿉니다." -팔로마 라나
라나의 작품이 프로젝트의 시작이 되었듯, 팔로마 울의 모든 컬렉션은 예술과의 접목이 두드러진다. 라나는 팔로마 울이 '다양한 예술 분야가 만나 어우러지는 창작 플랙폼'이 되길 바랐다. 이러한 방향에 따라 바르셀로나 로컬 아티스트와 꾸준히 협업을 이어갔으며, 의류를 주력으로 선보이는 만큼 모든 프로젝트는 옷을 입는 행위로 귀결되었다고 한다. 팔로마 울은 현재까지도 현지 예술가, 일러스트레이터 및 사진작가와 협력해 디자인을 완성하기도 하고, 커뮤니티와 도시 등에서 영감 받은 요소를 결합하는 등 독자적인 작품을 한 점씩 완성해 나간다.
팔로마 울이 이런 방식을 고수하는 이유는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는 가치를 생산하기 위함이다. 사실 팔로마 울은 패션 업계에서 요구하는 시즌제(S/S, F/W)를 충실하게 따르지는 않는다. 이는 매년 옷장에서 꺼내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겠다는 팔로마 울의 신념이 넉넉히 배어 있는 선택이다. 트렌드를 따르는 시즌제는 시간이 지나면 가치가 퇴색되는 반면, 팔로마 울은 고유의 가치와 이야기가 깃든 조각을 만들고자 했다. 또, 이런 행보를 통해 팔로마 라나 본인이 속한 예술 커뮤니티에 든든한 지지를 보내고자 했다. 공동체를 향한 지지와 연대는 팔로마 울의 핵심 가치 중 하나다.
"우리는 여전히 함께 놀고, 춤추고, 실험하고, 촬영하고, 공연하고, 건설하고 있습니다. 본능을 따르고 하기로 한 일에 충실하는 것 외에는 아직 규칙이 없습니다." -팔로마 라나
팔로마 울은 누구나, 어디서나 입을 수 있는 옷을 지향한다. 이들은 팔로마 울 제품을 입는 누구나 자신이 특별하고 아름답다고 느끼길, 편안하길 바라며 웃을 짓는다. 특히 프로젝트 전반에 걸쳐 여성을 향한 든든한 연대의 메시지가 강렬하게 느껴지는데, 이는 팔로마 울이 강조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팔로마 울 의류와 연계된 프로젝트 대부분의 사진과 동영상의 주체는 여성이다. 여성의 피부 컬러나, 신체 사이즈를 다양하게 그리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표현하고자 한 점도 돋보인다. 팔로마 울 캠페인 속 여성 중에는 전문 모델도 있지만 라나의 일반인 친구도 다수 속해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고자 한 일련의 노력을 엿볼 수 있다.
팔로마 울은 ‘여성 커뮤니티, 단단한 협업, 공동체’라는 키워드에 집중한다. 라나는 팔로마 울 프로젝트가 여성들이 자신의 주변 사람들을 존중하면서, 언제 어디서든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영감의 도구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동시에 여성만이 사용해야 할 도구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팔로마 울은 성별의 분계선을 명확히 하지 않으려는 실험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선보인 컬렉션이 그 증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2021년 여성과 남성 모두를 모델로 한 젠더리스 컬렉션을 선보였다. 이 역시 이분법적으로 나뉜 패션 카테고리에 반기를 드는 행보다.
팔로마 울은 다르다. 패션 브랜드를 운영하던 부모님을 보며 자란 어린 팔로마 라나는 어린 시절부터 알게 모르게 패션 업계의 문법화된 공식을 체화했을 것이다. 이 덕분에 자신의 패션 레이블이 가져야 할 차별성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지 않았을까. 팔로마 울은 팬데믹 기간에도 '팔로마 울'스럽게 전진했다. 다양한 분야의 아티스트를 초청한 ‘PW Live’ 무대를 만들고, 인스타그램에서 토요일 밤 하우스 댄스파티를 조직했으며, 친구 집에서 공식 캠페인용 사진을 촬영했다. '브랜드'라는 틀에 갇히는 것을 거부하자 프로젝트는 동그라미도 됐다가, 네모도 될 수 있던 것이다. 이들은 규칙을 없애는 대신 가치를 세웠다. 자신이 속한 예술 커뮤니티에 대한 지지와 무한한 사랑이라는 가치를.
팔로마 울 공식 웹사이트 https://palomawo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