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배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난 명절, 어른들이 주는 떡에 왼손이 먼저 나간 3살배기 조카가 들어야 했던 사투리입니다. 어른들도 나쁜 뜻은 없었겠지만 왼손잡이에 대한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이 묻어 있는 단어인 것 같아, 자신과 다른 무언가에게 느끼는 인간의 뿌리 깊은 거부감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독서모임에서 책 <90년생이 온다> (임홍택, 웨일북, 2018)가 이야깃거리로 나왔습니다. 이 책이 일종의 레퍼런스로 소비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90년대 생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을 내세워 “90년대 생은 이렇더라”하며 규정하고 구분 짓기 위해 인용하는 경우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인간은 구분 짓기를 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유명한 아담의 사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첫 인류가 금지된 열매인 선악과를 먹는데요, 이것을 먹으면 선악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아마 고대의 사람들은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는 것이 사고의 시작이라고 여겼던 것 같습니다.
선과 악처럼 대립되는 두 개념을 이항대립이라 합니다. 악이 없이는 선의 존재감이 옅어지듯, 어느 한 개체는 대립하는 개체와의 관계에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을까요? 이처럼 한 대상을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로 분석하는 것이 구조주의 철학입니다.
구조주의적 분석은 다른 것들과의 차이를 통해 그 대상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나 관계, 즉 구조 자체에 집중하다 보면 정작 본질인 개별 주체를 놓치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첫 인류는 선악을 구분하는 능력을 얻은 대신 낙원(이상향)에서 추방당했습니다. 90년생을 나와 다른 부류로 구분하는 것에서 그만두면 그들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어른들을 “꼰대”라고 치부해버리는 것도 마찬가지겠지요.
구분 짓기는 분명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구가 아니라 목적이 되는 순간, 이해는커녕 "짝배기"와 같은 폭력이 됩니다. 우리가 다른 가치관이나 생각을 마주할 때 느끼는 거부감은, 어쩌면 이해에 필요한 노력 혹은 고통에 대한 거부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 극복하고 조금 더 깊은 이해와 존중을 할 수 있다면 조금 더 살기 좋은 사회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