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 진 저 늙은이

2019년 11월 16일 밤

by 졸팍

회사원이라 누릴 수 있는 사치. 주말의 무료함을 타개하기 위해 산책을 나갔습니다. 꽤 추워진 주말 아침의 거리 한 공사판에서 어떤 이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행하던 나의 시선이 정지한 것은, 안전조끼의 밝은 형광색보다는 거친 수염의 빛바랜 은색 때문이었습니다.

주름이 깊게 팬 피부가 견뎌온 세월이, 어릴 적 잠깐이나마 보았던 조부의 것만큼 오래되었겠구나. 21세기에도 한 해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물을 따르고 수저를 깔지 않아도 되는 기괴한 나라인데, 저 삽은 내가 들어야 맞지 않나. 폐기된 유교의 잔재에 사로잡혀 근심스러운 나와 달리 노인은 무표정했습니다.

그 덤덤한 표정이 낯설지 않아 곰곰 생각해보니 대학 시절 만난 또 다른 노인의 얼굴이 있습니다. 폐지가 산더미처럼 앉은 손수레를 대신 끌겠다는 나에게, 노인은 짧은 침묵에 이어 말했습니다.

"그건 괜찮소. 그것보다, 며칠 굶어 배가 고프오."

일상적인 배고프다는 말과 전혀 다른 무게를 말하면서도 노인의 얼굴은 무표정했습니다. 그건 그에게 굶주림이 일상이기 때문이었을까, 생기를 잃어 슬픈 내색을 할 기운조차 없었던 것일까.

그 얼굴을 보는 내 표정은 어떠했던가. 내심 기대하던 만족감이 아니라,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돕자면서도 정작 그들의 삶은 한치도 몰랐다는 부끄러움이 표났을까. 생기를 잃은 노인 대신 슬퍼했을까.

비밀이 된 그날의 부끄러움은 어렸던 정의감과 함께 바쁜 삶에 바래졌고, 어젯밤 나는 친구들과 우리가 정말 중산층인가, 그러기엔 삶이 너무 팍팍하지 않은가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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