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으로 먼저 배운 커피

by 필민

가정용 커피 로스터를 처음 본 건 2001년, 드라마 〈호텔리어〉 속 한 장면이었다. 그 무렵 나는 직장인이었고, 화면 속 작고 묘하게 빛나는 기계에 눈을 뗄 수 없었다. 국내 기업 제품이지만 미국에서만 판매된다는 사실을 알고는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해외 직구라는 말조차 낯설던 시절, 비슷한 기계를 찾아다닌 끝에 100g 용 전기로스터를 구했다. 생두를 넣으면 알아서 볶아주는 단순한 장치였지만, 그 단순함이 내 삶의 빈틈을 채웠다. 무의미하던 시간 속에 커피가 들어왔다.


41세가 되어 평생교육원 커피 강좌에 등록했다. 수료 후에도 추출 연습을 이어갔지만 ‘볶음’은 여전히 미지였다. 공장 실습은 단 세 번뿐이었고, 수강생은 스무 명씩 나뉘어 차례로 구경만 할 수 있었다. 직접 손으로 볶아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배우기로 했다. 커피가 어떻게 볶이는지 알아야 했지만, 당시 국내엔 참고할 만한 책조차 드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여행 중 서점에서 한 권의 책을 만났다. 나카노 히로시(中野 弘志)의 『コーヒー自家焙煎教本(커피 자가배전 교본)』. 일본어 실력은 초급 수준이었지만, 궁금증이 사전을 이겼다. 읽고 또 읽으며 50번 넘게 반복했다. 가게를 연 뒤에도 이해가 될 때마다 책을 다시 펼쳤다. 심지어 표지에 ‘技術教本(기술 교본)’이라는 말이 보이면 무조건 샀다. 그렇게 내 서가는 점차 기술서들로 채워졌다. 역사, 재배, 산업제조기술에 관한 영어책까지 찾아 읽었다. 초소규모의 로스터였지만, 나는 그 속에서 커피 선진국의 기술과 철학을 배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좋은 커피는 기술보다 재료가 먼저라는 것을.


그 무렵 맛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책을 만났다. 최낙언의 『맛이란 무엇인가』였다. 책은 사과의 ‘맛’을 신맛과 단맛으로, 나머지는 ‘향’이라 했다. 맛과 향을 구분하는 순간, 커피의 세계도 새로워졌다. 마침 서래마을의 한 셰프가 저자를 초청해 10회의 강의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신청했다. 첫날, 커피업계 대표들도 수강생으로 와 있었다. 3년 전부터 관능평가에 매료된 나에게 그 시간은 꿀물처럼 달았다.


요리사가 요리를 맛보며 완성도를 평가하듯, 커피도 마찬가지였다. 볶은 커피에는 800가지가 넘는 향이 깃들어 있다. 그중 단 몇 가지만 알아차려도 대단한 일이다. 나는 코를 막고 커피를 마셨다. 후각이 차단되자, 입안에 남은 것은 ‘순수한 맛’뿐이었다. 그 단순함이 놀라웠다.


‘8’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던 나에게 800이라는 숫자는 묘한 친근감으로 다가왔다. 예전엔 전화번호와 차량번호에도 ‘8’을 넣으려 애썼다. 끝이 끊기지 않는 그 형태가 좋았다. 최근 읽은 책에선 ‘8’이 중국어 ‘번영(發)’과 발음이 비슷하다 했다. 그래서일까, 2008년 베이징올림픽도 8월 8일 8시 8분에 개막했다.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사소하지만, 커피의 향도 그런 사소함 속에서 빛난다.


커피의 향미를 구별하는 일은 어렵다. 훈련된 전문가라도 스무 가지를 넘기기 힘들다. 같은 향도 양과 순서에 따라 전혀 다르게 인지된다. 나는 그 복잡함 속에서 ‘감각의 본질’을 생각했다. 특히 시각은 언제나 맛을 왜곡한다. 보이는 것에 속지 말고, 본질을 보는 눈이 필요했다.


블랙커피는 재료가 달라도 결국 한 잔의 커피일 뿐이다. 그러나 맛있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잔의 질감, 주변의 빛, 함께 있는 사람, 그날의 공기까지 작용한다. 그 모든 조건을 넘어선 후에야 나는 묻는다. “나는 지금, 이 커피에서 내가 원하는 향을 만들고 있는가?” 그 질문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나의 커피 공부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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