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단한 시간 앞에서 모두는 죄인이 된다

by 신모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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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여름 (First Summer, 2025)

살다 보면 부지기수로 삶을 배신하게 된다. 속고 속이다 보면 객관적 사실과 억측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시야는 좁고 도로를 둘러싼 벽은 높다. 행운, 허황된 상승 기류 혹은 구차한 허무주의를 맹신하며 삶의 작은 과제들을 빠르게 돌파한다. 불현듯 어느덧 저문 세월이 한스럽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미래 우리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외면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일순간 장면은 전환된다. 클라이맥스. 이제는 삶이 우리를 배신할 차례다. 하지만 배신이 마냥 더러운 것만은 아니다. 초점을 맞추다 보면 인생을 재정비할 기회가 선명히 드러난다. 영순에게는 춤과 노래가 있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는 돌릴 수 없는 것으로 놓아두고 현재를 깨끗하게 씻어낸다. 젊은 날과는 달라진 나. 내가 믿는 건 이 순간의 나 자신이다. 인정받지 못한 가사 노동, 병수발로 잊힌 청춘, 늙은 남편이라는 족쇄, 박탈감, 박탈감, 박탈감, 그러나 나는 존재한다. 이제는 나 자신을 존중할 차례다. 아무 곳에도 없던 여자는 이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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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볼버 (Revolver, 2024)

약속을 지키는 건 마음을 지키는 일이다. 책임을 진다는 건 진실을 지키는 일이다. 어떤 고개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넘어설 수 없다. 물론, 누군가는 대가를 회피할 수도 있을 테다. 돈과 명예, 갖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하지만 사람의 중심에는 마음, 뒤를 받치는 건 진실. 지키지 않고서는 바로 설 수 없다. 솔직함은 미덕이 아니다. 말과 행동, 마음의 삼위일체는 사람을 똑바로 걷게 만든다. 언젠가 절룩대는 다리로 능선을 구르고 싶지 않거든 약속을 지키고 책임을 지며 사는 것이 좋을 테지만, 문제는 절룩대도 좋다는 어리석음이 우리의 시대 정신이라는 데 있다.


수영은 본의 아니게 약속을 지키고 책임을 지고 마음을 지키고 진실을 지켰다. 똑바로 걷는 수영은 여러 주변인을 뚫고 나아갈 수 있었다. 목표를 관철하는 일에 가슴 타는 고뇌는 필요하지 않다. 그저 걷고, 또 걷는다. 그리고 목표를 이뤄낸 뒤에는 막다른 길이 등장한다. 어쩌면 스스로 다리를 동강 낼 수도 있다. 운명이 가진 본질적인 한계란 인간이 타고난 쓸쓸함이다. 사나운 비바람과 옅은 해무, 오색 파라솔 밑으로 닥치는 불가사의한 고뇌. 나와 맞지 않는 세상, 돈이라는 멍에와 함께 세상의 바깥에서 사랑 없이, 사랑 없이, 사랑 없이 쓸쓸하고 고단한 내가 불현듯 초라하게 느껴질 때, 더는 세상에 기대할 수 없는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이제는 지켜야 할 약속이 없다. 짊어져야 할 책임 역시도. 그렇다면 나는 어떤 방식으로 마음을 지키고 진실을 지킬 것인가. 하지만 때로, 실존적 질문 앞에 선 우리는 글라스 한 잔을 앞세우게 된다. 더 나은 삶이 없는 것을 알아도 살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살아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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