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남과 머무름, 그 사이 어디선가
낯선 익숙함
익숙하지만 조금은 낯선 여행이 또 시작되었다. 1년에 한 번씩은 서울에 온다. 자주는 아니지만 적당한 때에 한 번씩,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울을 찾게 된다. 1년 만의 방문이지만 그 사이 많은 것들이 변해있다. 공항에서 나와 리무진 버스를 기다리며 깊숙이 숨을 들이켠다. 익숙한 공기가 머릿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기억들을 하나씩 깨워 헤집고 다닌다.
시선은 창밖의 풍경에 고정되어 있지만, 내가 알던 기억 속의 모습과 달라진 점은 없는지 쉴 새 없이 눈동자가 움직인다. 어느 건물이 새로 생겼고, 어느 간판이 바뀌었는지, 어느 길이 넓어졌는지...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얼굴에서 세월의 흔적을 찾아내듯 도시의 변화를 읽어내려 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낯선 익숙함이라는 묘한 감정이 그림자처럼 나를 따라다닌다.
외국인 놀이
와이프와 함께 오면 서울은 내가 알던 서울이 아니게 된다. 평생을 서울에서 나고 자랐지만, 내가 알던 서울과 지금의 서울은 많은 것이 바뀌어 있다. 물론 그 사이 서울은 국제적인 도시로 거듭났고, 수많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찾는 매력적인 도시 중 하나가 되었으며, 치안과 청결함 모든 면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변모했다.
집과 학교만을 오가던 학생 시절이나, 집과 회사만을 기계적으로 오가던 직장인 시절에는 경험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이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서울의 숨은 명소들을 찾아 헤맨다. 서울 구석구석을 정말 잘도 다닌다. 마치 처음 온 관광객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 도시를 바라본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나는 내가 평생을 살아온 이곳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구나.
나는 왜 떠났을까?
정말 많이 걸어 다녔다. 하루 만보는 기본이었다. 걷다 쉬다를 반복하며 지칠 때까지 이 도시의 모든 것을 흡수하려 했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며, 명소에 가고,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남산 한옥마을에서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보기도 하고,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텐트를 빌려 따스한 봄볕 아래 낮잠도 자고, 성수동에서 수많은 외국인들 틈에 섞여 쇼핑의 즐거움도 만끽하고, 경의선 숲길에서 향긋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산책을 즐기고... 핫하고 힙하다는 곳이라면 어디든 발걸음을 옮겼다.
화창하고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 어디를 가나 생명력 넘치는 푸르름과 만개한 꽃들이 가득했다. 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을 받으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날씨 때문이었을까? 내가 이토록 아름다운 도시에서 살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애틋해졌다. 내가 이곳을 떠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눈부신 햇살 때문에 제대로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지나가고 흐려진다
한국을 떠나면서 수백 가지 이유를 만들어냈다. 떠날 수밖에 없는 절실한 이유와 떠나야만 하는 필연적인 이유들을 앞세워 스스로의 등을 떠밀며 이곳을 벗어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때의 그 절박했던 이유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여전히 치앙마이에서 살고 있다. 그저 내가 원하는 삶이 여기 있다는 단순하고도 명확한 이유뿐이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하면 많은 것들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자연스럽게 지나가고 흐려진다. 마치 카메라의 초점을 맞추면 배경이 부드럽게 블러 처리되는 것처럼.
서울에서의 한 달은 그렇게 흘러갔다. 떠나온 이유를 되묻게 하고, 지금 내가 선택한 삶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떠남과 머무름, 그 사이 어디선가 내 마음도 조용히 정착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