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순 없어

뒷심을 발휘할 때임을 직감한 날의 회상

by ONNA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아세안 국가에 주재할 경우 운전기사가 제공되는 경우가 많다. 오토바이 통행량이 많은 아세안국가의 도로를 직접 운전한다는 것은 사고 위험도 높고, 만약 사고가 발생했을 때 법적 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차라리 운전기사를 두는 것이 더 경제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경우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국제운전면허증을 이용해 내가 직접 운전해야 했다. 첫날은 회사에서 이동을 도와주었지만, 둘째 날부터는 미팅 장소든 어디든 스스로 운전해 이동했다.


처음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할 때는, 예상보다 넓고 정돈된 도로 덕분에 ‘운전할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첫 출근길, 오토바이 부대와 마주친 순간 산산이 깨져버렸다. 공항과 도심을 잇는 넓은 도로와 달리, 도심 안쪽 도로는 차량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정도로 폭이 좁았고, 그 좁은 길 위로 오토바이와 보행자, 차량이 뒤엉켜 제각각 움직이고 있었다. 게다가 끝 차선 하나는 항상 정차된 차량으로 막혀 있어 정체가 기본이었다.


이정표는 있었지만 도로는 예고 없이 폐쇄되거나, 시간대에 따라 열렸다 닫히기를 반복해 늘 정신을 바짝 차려야 했다. 간단히 묘사하자면, 좌우가 바뀐 편도 3차선 도로에서 왼쪽 끝 차로는 정차된 차량으로 막혀 있고, 오른쪽 끝 차로는 유턴 차량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회전하려는 차량은 가운데 직진 차선에 눈치를 보며 멈춰 서게 되고, 결국 그 어떤 차량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교통 지옥이 펼쳐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왕 이렇게 된 거 운전하지 뭐’라는 생각이었다. 막상 시내 주행을 시작해 보니, 오토바이들도 차를 잘 피해 다녔고, 나 역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운전해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도로에 나섰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날은 출장을 마치고 가족들과 외식을 하려고, 시암 근처에서 아이콘시암 방향으로 이동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도로 분위기가 뭔가 이상했다. 출장지에서 큰 도로로 나왔는데, 차가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길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단순히 신호가 긴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10분, 20분이 지나도 차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결국 나는 꼼짝없이 그 자리에 2시간을 서 있어야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태국에서는 왕족이 이동하는 경로의 도로는 일반 차량의 통행이 제한된다. 대부분 사전 공지 없이 갑작스럽게 통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처럼 약속에 늦는 일이 흔히 생긴다고 한다. 이처럼 황당한 상황에서도 불만을 제기할 곳이 없고, 설령 민원을 넣는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나는 우리나라의 민주적이고 열린 행정이 문득 그리워졌다.


또한 태국에서는 왕실에 대한 불만을 공개적으로 표현할 경우, 외국인이라 하더라도 왕실모독죄로 처벌받을 수 있기 때문에 언행에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운전이 생활의 일부인 것처럼, 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데에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내가 외국 생활의 녹록지 않음을 실감하게 된 대표적인 경험은 바로 비자 문제였다.


입국 당시 내 비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관광용 무비자 90일로 먼저 입국할 수밖에 없었다. 비자의 종류나 대행업체는 이미 정해져 있었고, 관련 업무도 진행 중이었지만 내가 무비자로 입국해야 했던 이유는 담당 공무원의 부재 때문이었다. 한국인이라면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지연사유다. 하지만 한국만 그렇지 않다는 것도 그제야 알게 됐다.


당시 내 서류를 맡은 담당자가 코로나19에 감염되어 약 2주간 자리를 비운 상태였고, 그로 인해 행정 절차가 전혀 진행되지 않았다. 담당 공무원이 없으면 민원 처리가 멈춘다고?’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가족이 입국하고, 아이가 학교를 다니게 되자 마음속 답답함과 불안은 점점 커져만 갔다. 결국 더는 기다릴 수 없어 다른 방법을 찾아보기 시작했지만, 원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비용이 훨씬 더 많이 드는 구조라 어떤 결정도 쉽게 내릴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태국에 입국한 지 두어 달쯤 지나서야 하나둘씩 일이 풀려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비자를 최종적으로 완료하려면 한국에서 전자비자(e-visa)를 받아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날더러 한국엘 다녀오라고??’


당장 한국에 가서 비자를 받고 싶었지만, 혹시 태국 내에서 해결할 방법이 있을까 싶어 알아보던 중, 한 대행사에서 가능하다고 해서 이민국을 찾아갔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관광비자 60일을 다시 받아오라는 엉뚱한 이야기였다.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에 1톤짜리 바위가 얹힌 기분이 든다.


결국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 조금 늦어지더라도 다음 한국 출장 때 미리 준비해 비자를 받는 방향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비자가 조금 늦어진다고 큰 문제가 생길까 싶지만, 비자와 워킹 퍼밋(노동허가)이 없으면 통장 개설조차 불가능하다. 그렇다. 나는 통장 없이 몇 달을 버텨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통장 없이도 한국에서 가져온 자금으로 살 수 있는 것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요즘은 현금을 받지 않고 QR 결제만 가능한 곳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잦은 환전으로 생기는 수수료도 은근히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정말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요즘은 GNL 앱을 통해 QR 결제가 가능해져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아마 비자와 관련해 불편을 겪는 분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게다가 요즘 태국 정부는 무비자로 장기 체류하는 관광객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고 있어, 회사 사정으로 비자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비자 90일만으로 입국한 경우, 비자런(?)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워킹 퍼밋과 비자를 사전에 모두 준비한 상태로 입국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며, 이를 위해서는 충분한 사전 준비가 꼭 필요하다.


비자를 준비하면서 놀랐던 점이자, 실제로 경험해 보니 다소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던 부분은 바로 서류 서명이었다. 본인 확인이나 서류 원본 확인을 위해 제출하는 모든 문서에 직접 서명을 해야 하는데, 워킹 퍼밋과 비자 관련 서류가 A4 용지 한 묶음 수준이다 보니 전부 서명하는 데만도 시간이 꽤 걸렸다. 그래서 태국에서 사용할 서명은 조금 간단하고 심플한 형태로 정해두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비자 문제가 해결되고 운전에도 조금씩 적응해 가던 어느 날, 업무를 마치고 퇴근하던 길이었다.


큰길 사거리만 하나 건너 우회전하면 바로 집으로 가는 골목이었기에, 평소처럼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록불 직진 신호가 켜져 큰길을 건너던 순간, 갑자기 경적 소리가 울리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차가 크게 흔들렸다. 5톤 트럭이 직진 차로에서 급하게 우회전하며 내 차의 조수석 뒤쪽을 들이받은 것이다. 정신이 아득했고, 놀란 마음에 한동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의외로 꽤 침착하게 보험사에 전화를 걸고, 렌터카 업체에도 연락했다. 내 차와 트럭이 도로를 막고 있었기에 급히 사진을 찍은 뒤, 차량을 한쪽으로 이동시켜 주차했다. 잠깐이지만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며 워킹 퍼밋도, 비자도 모두 해결했고, 아이도 이제 막 학교에 적응하며 즐거움을 찾아가던 참이었다.


‘이 정도 일로 한국으로 돌아갈 순 없어.’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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