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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도 중요한 건 사람이었다.

사람이 온다. 나를 도와주는 사람이 온다.

by 최호진

설레는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캐나다에 오고 얼마 되지 않아 한 출판사 담당자가 나에게 메일을 보내왔다. 휴직 후 나의 경험을 블로그를 통해 봤다는 담당자는, 나의 이야기를 책으로 펴 낼 의향이 있냐고 물어 왔다. 캐나다에 와서 나의 휴직 이야기를 글로 정리하고, 책 원고를 써야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터라, 출간을 제안한 메일이 반갑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이야기를 알아봐 주는 것 같아 감사했다.


하지만 설레고 감사한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담당자가 상부에 보고하는 과정에서 일이 어그러졌다. 생각보다 나의 경험이 대중성이 없다는 게 회사의 결론이었다고 한다. 아쉬웠다. 하지만 그래도 며칠이나마 작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행복했다. 나의 이야기를 잘 정리하면 좋은 책을 쓸 수 있을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 거절을 당했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출간 제안을 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좋았다.

메일을 주고 받는 와중에, 출판사 담당자는 나에게 매일의 일상을 잘 정리하라는 조언을 했다. 그것이 훗날 원고 작업 과정에서 기억을 되살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취지의 조언이었다. 매일 블로그에 기록을 남기던 나로서 기억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꼭 원고 작업으로 연결되지 않더라도 매일의 기록은 나의 캐나다 일상을 의미 있는 날들로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들을 캠프에 보내놓고 혼자 커피숍에 가서 매일 글을 썼다. 캐나다에서 아이들과의 경험을 상세히 기록했다. 아쉽게도 그 이후로 나는 출간을 제안하는 그 어떤 메일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매일의 일상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재미난 일이 일어났다. 우연히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 저는 위니펙에서 태어나 자란 캐나다 사람입니다. 한국어도 공부 중인데, 요즘 네이버 가입하고 위니펙이라고 검색해 보니까 님의 블로그 발견했습니다. 여기 2달이나 머무르실 거네요. 잘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거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캐나다 일상을 기록했던 블로그에, 하루는 재미난 댓글이 달렸다. 캐나다 사람이썼다는 사실이 의심될 정도로 완벽한 우리말로 쓰여진 댓글이었다. 댓글을 보자마자 그가 궁금한 나는. 대화를 주고 받다 날짜와 장소를 잡고 그를 직접 만나기로 했다.

대뜸 만나자고 해놓고 후회도 했다. 괜한 일을 한 것은 아닌지, 이상한 사람은 아닌지, 두려웠다. 혹시 그 사람이, 나와 우리 아이들을 노리고 계획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닐까 혼자 범죄 드라마를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너무 궁금했다. 무슨 이유로 한국어를 공부하게 됐는지 알고 싶었다. 게다가 며칠동안 아이들 외에 만나는 사람이 거의 없던 나로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사람들을 좋아하는 나는, 사람들이 고팠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언제나 설레기도 하면서 두렵기도 하다.

다행히 그는 나를 노리고 계획적으로 접근한 사람은 아니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와 커피숍에서 만나 두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게 되면서 그는 한국과 한국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나도 모르는 한국 드라마들의 제목을 열거하기도 했다. 드라마와 유튜브를 통해 독학으로 한국어를 공부한 그는 한국어 외에도 스페인어, 프랑스어, 일본어까지 구사할 수 있다고 했다. 언어적 감각이 남달랐다. 하지만 그의 언어능력은, 타고난 재능으로만 만들어 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 사실을 그의 휴대전화를 보고 알 수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 설정을 한국어로 해 두었다. 모든 앱에 대한 기본 설명이 한국어로 되어 있었다. 한국어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활용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이 돋보였다. 언어는 꾸준한 노력이 중요하다는 아주 당연한 사실을 그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10살 이상 어린(정확한 나이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학생이었다. 이름은 라이언이었다. 위니펙에 있는 전문대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하고 있었다. 한국 드라마도 보고, 개와 산책도 하며 그는 방학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무엇이 되기 위해서 애쓰지 않고 지금을 즐기려는 모습도 보였다. 그렇다고 그가 미래를 포기하고 대충 살려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의 전공인 저널리즘에 나름 생각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스펙을 쌓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한국의 대학생이 떠오르기도 했다. 캐나다라는 곳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원래 그가 그런 사람인지 알 수 없었으나 여유로운 그의 태도가 부러웠다.

방학 중인 그와 그 이후로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한국을 좋아하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만나서 위니펙 근처를 둘러보기도 했다. 우리 아이들과도 만나 한국 이민자들이 진행하는 쇼를 같이 보기도 했다. 알게 모르게 도움도 받았다. 글로서 이렇게 새로운 인연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또 감사했다.

위니펙에 온 지 3년 됐다는 한국 이민자와도 만날 수 있었다. 그 분 또한 나의 블로그 글에 댓글을 달아주신 덕분에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

한국의 대기업을 다녔던 그는 인간적인 삶을 살기 위해 이민을 선택했다고 했다. 매일 야근하고, 술 마시는 일상에서 가족과 멀어지는 자신을 발견한 그는, 더 이상 안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캐나다로 오게 되었다. 다행히 그는 캐나다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다. 한국에서보다 훨씬 수입이 적고, 영주권이 나오지 않아 아직은 불안한 상태지만, 아이들과 저녁 식사 후 산책을 할 수 있고, 주말마다 캠핑을 다닐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이민을 선택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민 오는 사람들 중에,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온다는 사람들을 경계했다. 아이들을 위해 자기 삶을 희생하는 것은 안된다고 이야기하며 그 어떤 선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내가 캐나다에 온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다행히 나는 아이들을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물론 아이들에게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이번 캐나다 여행은 나에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선택한 것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래저래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줬다. 덕분에 여행의 이유도 고민하게 됐고.

아쉽게도 그와는 한 번 밖에 만나지 못했다. 낮에는 그가 일해야 했고, 밤에는 내가 애들을 돌봐야 했기에 일정을 맞추기 어려웠다. 그가 한국에 오면 꼭 다시 만나서 소주 한잔 하자고 이야기 하며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나의 블로그 글을 보고 댓글을 달아서 선뜻 다가와 준 그가 고마웠고 꼭 보답하고 싶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사람의 일생이 함께 오기 때문이다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의 일부다. 캐나다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나면서 이 시가 자꾸 생각났다. 한 사람을 만나서 그의 역사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들의 역사는 나의 역사를 되돌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블로그에 글을 남긴다고 돈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출간 제안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나를 되돌아 보게 만들었다. 돈을 버는 것보다, 책을 내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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