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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노랗게 보이다.

배가 아파서, 결국 병원에 갔다.

by 최호진

캐나다에 와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 생겼다. 아무 생각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곳의 하늘은 유독 파랬다. 파란 하늘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이들 도시락을 챙기고, 돌보고, 커피숍에 앉아서 책 읽고, 글을 쓰고 있으면 여기가 한국인지, 캐나다인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하늘을 봤다. 파란 하늘을 보고 나면 이곳이 캐나다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하늘을 보고 있으면 막연히 두려웠던 것들이 생각보다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그냥 내 마음이 그랬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파란 하늘이 갑자기 노랗게 변했다.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늘만 바라봤는데, 두려움이 온몸을 덮치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그 날을 생각하면 손이 바르르 떨리고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그때 나는 정말 무서웠다.


캐나다에 도착한 지 10일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은 1주일 동안의 캠프 활동을 마쳤다. 모든 게 순조로웠다. 토요일,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아이들이 자고 있는 사이 동네 한 바퀴를 돌 생각이었다. 그간 제대로 뛰지 못한 터라 몸이 근질거렸다. 그런데 자고 있던 아들이 나에게 와서 배가 아프다고 했다. 웬만해서 아프다는 이야기를 안하는 녀석인데, 의아하긴 했다.


아이는 캠프에 다니는 며칠 동안 약간 흥분했었다. 캠프가 너무 재미 있다며, 새로운 생활을 즐겼다. 캠프에서 노는 게 좋아서, 도시락으로 싸준 점심도 후다닥 먹었다고 했다. 그래서 탈이 났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별 거 아닐 거라 생각했다. 화장실에 가면 나을 거라고 쿨하게 이야기 하고 몇 번 배를 문질러 준 후, 달리기를 하러 밖으로 나갔다. 간만에 길게 달렸다. 10km를 한시간 정도 달렸다. 달리면서 동네도 둘러보며 주말 아침의 상쾌함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이에게 갔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이는 나를 보자마자 왜 이렇게 오래 뛰고 왔냐며, 나를 타박했다. 아이에게 미안했다. 한 시간동안 나를 애타게 기다렸던 것 같았다. 하지만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별 거 아닌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별 거 아닌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배가 심하게 부풀어 오르며 아팠던 적이 있었다. 너무 아파 제대로 걷기 어려웠다. 병원에 가서 X-레이까지 찍었다. 의사는 배에 가스가 가득 차서 그런 거라며 약을 처방해줬다. 약을 먹고 화장실에 오래 앉아 있었더니 정말 괜찮아 졌었다. 아이의 상태를 보니 그때가 생각났다. 아이도 배에 가스가 차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배를 만져보니 배가 부풀어 오른 것 같기도 했다. 의사의 처방대로 화장실에 앉아서 가스를 빼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아이의 상태는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일요일까지도 아이의 복통은 계속 됐다. 한국이었으면 병원에 갔을 테지만, 캐나다이기에 병원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병원비도 문제였고, 이 곳 병원에 대한 믿음도 없었다. 대신 약국에 가서 배에 가스 빼는 약을 사 먹였다. 약을 먹고 얼마 되지 않아 아이는 배가 부글 부글 끓는다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리고 나는 그 신호를 배에 가스가 빠지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이에게 곧 괜찮아질 거라고 이야기 하며 배를 열심히 문질러 주었다. 아이는 힘들어 하면서도 잘 버텨주었다. 그리고 이내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야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월요일 아침, 도시락을 준비하며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아이는 캠프에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전히 배가 아프다고 했다. 결국 둘째만 캠프에 바래다 주고, 큰 아이와 동네 병원에 갔다. 의사의 처방을 받아 약을 먹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한 나는 아이 캠프 짐도 챙겨갔었다.


클리닉이라고 하는 병원은 우리나라로 치면 가정의학과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사와 처음으로 만났다. 의사는 믿음직스럽지 않았다. 의사 가운도 걸치지 않았고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의사는 아이의 배를 톡톡 두드리다가 오른쪽 아랫배를 꾹 눌렀다. 그리고 손을 뗐다. 손을 떼는 순간 아이는 소리를 지르며 아프다고 했다. 의사는 아무 표정없이 나에게 어펜딕스 일 수 있으니 큰 병원에 가보라고 알려줬다. 어펜딕스가 뭔지 몰랐던 나는 의사에게 스펠링을 물어봤다.


A.P.P.E.N.D.I.C.T.I.S


의사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부랴 부랴 휴대전화로 단어를 찾아봤다. 충수염이라고 나왔다. 흔히 말하는 맹장염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진단이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맹장염에 걸리면 엄청 아프다고 하던데, 아이가 극심한 고통을 호소했던 것도 아니었다. 뒹굴뒹굴 구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의사의 오진일 것이라 생각했다.


의사의 추천서를 들고 병원에서 나왔다. 병원비 60불을 내고, 병원을 터벅 터벅 나오는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했다. 맹장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동네 돌팔이 의사의 오진이라 믿었지만 이런 저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다


‘오진이 아니라 맹장이 맞으면 어떻게 하지?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여기서 맹장 수술을 잘 할 수 있을까? 돈은 얼마나 드는거지? 1억 넘게 들면 어떻게 하지? 입원하게 되면 그동안 둘째는 어떻게 해야하지?’


병원에 나와 아픈 아들을 옆에 두고 주차장에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노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이가 너무 불쌍했고, 아이에게 너무 미안했다.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안심시켰다.


"오진일거야, 의사도 이상하게 생겼잖아. 그리고 맹장이면 엄청 아프다던데 그러지도 않았잖아. 괜찮을거야 얼른 병원가서 약 처방 받고 쉬자."


아이에게 안심을 시키고 차에 들어가 시동을 켰다. 순간 아내가 너무 보고 싶었다. 이 때 아내가 옆에 있었다면 함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을텐데,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 외로웠다. 아내에게 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새벽 시간이어서 할 수도 없었다. 괜한 걱정을 아내에게 안겨주고 싶지도 않았다. 너무 무섭고 외로웠다. 울고 싶었지만 아들이 보고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아들을 생각하며 태연한 척 하며 차를 몰고 종합병원으로 가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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