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마라톤 도전기 2
첫 풀코스를 앞두고 출발대 앞에 섰다. 풀코스는 사람이 얼마 없을 줄 알았는데 만명도 넘었다. 달리기에 미친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삼삼오오 함께한 사람들 옆에서 나는 혼자 출발을 준비했다. 어차피 레이스는 고독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군가 한 명이라도 같이 있었음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출발을 준비하며 이런 저런 걱정이 들었다. 완주를 할 수 있을까? 원하는 목표 시간을 달성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런 걱정보다 더 큰 걱정이 하나 있었다. 바로 4시간 내외의 시간 동안 화장실을 한 번도 안갈 수 있을까였다.
몇 주 전 달리기 연습을 하며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마라톤 전문가(?)들과 저녁에 함께 달렸다. 그리고 그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풀코스 중간 중간에 화장실을 간다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오줌을 참지 못하고 자연 화장실에다가 싸 버리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과연 나는 풀코스 마라톤 대회에 나가서 화장실을 잘 참고 갈 수 있을까 걱정됐다.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가면 되는데, 나는 화장실에 가고 싶지 않았다. 화장실에 다녀오느라 쓸데 없는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았고, 나만의 달리기 리듬을 깨고 싶지 않았다. 일부러 경기 당일 새벽에 물 마시는 양을 최소화했다. 경기 직전에 화장실에서 마무리하기까지 했다. 쓸데 없는 것에 목숨거는 스타일이어서 그런지 그냥 나는 "깔끔하게" 나의 첫 풀코스를 뛰고 싶었다.
그렇게 어이없는 목표를 갖고, 나는 풀코스를 달리기 시작했다. 초반에 에너지를 소모하면 안된다는 생각에 천천히 달리며 서서히 페이스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건 달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화장실을 가시는 분들이 진짜 보였다. 건물에 들어가 일을 보고 오시는 분도 있었고, 주유소 화장실을 이용하시는 분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로 자연이 만들어 놓은 곳에 "불법"으로 방뇨를 하시는 분들도 있으셨다. 급하면 그럴 수도 있겠단 생각도 했지만 나는 저렇게 달리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나의 방광 상태를 체크하며 달렸다.
달리면서 나는 최대한 에너지를 비축하며 달렸다. 초반에 괜히 무리했다가 나중에 퍼지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걸음씩 그렇게 달리기 시작했다. 몸이 아주 가뿐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힘이 든 것은 아니었다. 적당히 주변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며 달릴 수 있었다. 5km, 10km 지나면서도 몸 상태는 평온했다. 목이 마르기 전에 물을 마셔둬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수대가 있는 곳에서는 줄을 서서 기다리는 한이 있어도 물을 마셨다. 10km 도착 전에는 영양젤을 먹으며 영양소를 보충했다. 하프까지도 크게 무리가 없었다. 그렇게 천천히 나의 페이스대로 잘 갈 수 있었다.
페이스 메이커 몇을 지나치기도 했다. 한참 뒤에서 출발했던 터라 5시간, 4시간 40분, 4시간 20분 페이스메이커까지 다 제치고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목표했던 4시간 페이스메이커 앞까지 따라갈 수 있었다. 그들을 따라가면 충분히 내 기록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25킬로미터 지난 급수대에서 그들이 물을 마시면서 잠시 대기하고 있는 찰나에 내가 그들을 앞서서 나갈 수도 있었다.
문제는 30킬로미터 지점이 넘어서면서부터 발생했다. 몸은 확실히 잘 알고 있었다. 내가 33킬로미터까지만 뛰어 봤다는 사실을 말이다. 역시나 30킬로미터 중반으로 넘어가면서부터 나의 페이스는 급격히 하락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내가 힘든 구간에, 응원하는 사람들이 옆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나를 응원하러 온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그들이 목청껏 잘 달리라고 외쳐준 덕분에 젖먹던 힘까지 다 짜낼 수 있었다. 응원단이 주는 사이다도 한 잔 마시고, 귤도 먹고, 레몬까지 먹은 덕분에 그래도 끝까지 힘을 낼 수 있었다.
걱정하던 화장실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초반에 사람들이 화장실을 갈 때는 가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막상 30킬로미터가 넘어서면서부터 몸이 힘들다보니 화장실 가고 싶다는 생각은 전혀 나지 않았다. 역시나 내 걱정의 반 이상은 다 쓸데 없는 걱정이었다.
드디어 내가 그토록 바라던 잠실 경기장이 보였다. 이제 조금만 가면 끝이었다. 그런데 도저히 뛰기가 힘들었다. 잠시 숨을 고르며 걸었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이때는 몸을 가다듬을 수 없다. 오직 정신력으로만)사력을 다해 뛰었다. 그리고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다"
정말 천만 다행이었다. 걸었을 때 아이들이 봤다면 정말 뛰기 싫었을텐데 내가 뛰기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아이들이 나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정말 마지막 힘을 다 해 뛸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바라던 잠실주경기장을 돌고 최종 골인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응원나온 게 너무 행복했다. 아이들 앞에 잠깐의 페이크가 있긴 했지만 건강하게 웃으며 뛸 수 있어 감사했다.
도착하고 아이들을 만났다. 너무 반가웠지만 힘이 없었다. 결국 얼마 가지 않아 나는 털썩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정말 풀코스는 힘든 것이었구나"
완주 끝나고 내가 처음으로 느낀 감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완주하고 울기도 한다는데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냥 힘들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뭘 얻겠다고 난 이런 힘든 걸 도전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