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2019년을 잘 정리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지난주 아이들과 2박3일 일정으로 스키장에 다녀왔다. 올 겨울 처음으로 가는 스키장이었다. 스키를 탈 때만 해도 별 생각이 없었다. 날이 추워졌고, 스키장이 개장했으니 자연스럽게 다녀왔을 뿐이었다. 스키는 즐거웠다. 잘 타지 못하지만 아이들과 함께하니 더 신이 났다. 함께 스키를 탈 수 있을 정도로 아이들이 컸다는 사실이 좋았다. 처음에는 어색해 하던 아이들은 작년에 탔던 기억을 떠을리며 곧잘 내려왔다. 확실히 머리는 타는 법을 잊었어도 몸은 잘 기억하는 듯 했다.
그렇게 스키장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집에서 짐을 정리하고 일요일 오후 거실에 앉아 편안하게 휴식을 즐겼다. 그런데 문득 달력을 보고 나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12월 1일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1월이 다 끝나고, 2019년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인지하게 된 것이다. 스키 시즌의 시작이 연말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2020년이 정말 눈앞에 다가온 듯한 느낌이었다. 2019년을 어떻게 해서든 잘 마무리하고 싶은 "욕심"이 들기 시작했다. 스키장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은 어느새 잊혀졌다. 한동안 머릿속이 복잡했다. 남은 한 달을 어떻게 해야 "잘"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남은 한 달, 미친듯이 해서 뭐라도 만들어야 하나? "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1년 동안 나름 분주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손에 잡히는 결과물이 없었다. 휴직을 하고 직장 밖에서 지내면 뭐라도 "뚝딱"하고 쉽게 나올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세상은 내 생각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덜" 노력해서 그랬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12월 동안 "빡시게"하면 뭐라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한다고 뭐가 나오겠어?"
하지만 한 켠에서는 조급한 나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2019년이 끝나기 전에 뭐라도 만들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서두른다고 뭔가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성과물"을 만드는데 1년도 짧은 시간인데, 한 달 안에 나온다는 것이 "미친" 생각이었다. 뭐가 나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제대로"된 것일 리가 없었다. 냉정하게 돌아보니 조급한 마음이 조금은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우연히 지인과 점심을 먹을 때 동석했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인생에 허튼 경험이란 없는 것 같아"
함께 점심을 먹었던 지인은 국책은행에서 자금 조달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는 신기한 이력을 가진 분이셨다. 카이스트 공대를 나와 병역특례로 IT회사에서 근무했다. 하지만 그는 곧 모대학 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딴 후 커리어의 방향을 틀어 은행에 취직했다. 그리고 십수년간 공대 졸업장과, IT 개발 경력이 쓸모 없는 영역에서 일을 하고 살았다. 하지만 최근들어 그의 IT 개발 경험이, 부서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금융권에 부는 디지털 바람 때문에, 모든 부장들이 코딩 수업을 들어야 했는데, 관련 수업의 과제를 지인이 해주게 된 것이었다. 그 말고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나름 그의 IT 개발 경험은 그의 사회 생활에 쏠쏠한 윤활유 역할을 해주었다고 한다.
곰곰이 따져보면 웃기기도 하고, 슬픈 이야기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경험이든 언젠가 "쓸모있는" 것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리고 나의 경험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어떤 방법으로든 경험의 가치를 나에게 알려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성과물을 만드느냐 안만드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무엇을 만드느냐보다는 지금까지 한 것을 잘 정리해보는 게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생각은 어떻게 하면 2019년을 잘 정리할 수 있을까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다. 며칠동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2019년을 잘 정리할 수 있는 재료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년동안 나는 꾸준히 나의 일상과 생각을 기록으로 남겼다. 네이버 블로그에 매일같이 글을 썼다. 연초 제주도 여행부터 시작해서, 자기혁명캠프, 지리산 단식, 캐나다 여행 등등 올 한 해동안 경험했던 것들과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고스란히 잘 저장되어 있다. 브런치에는 휴직기간 동안의 생각을 담아 몇 개의 매거진도 발행했었다. 이런 글들이 나의 2019년을 잘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한 달 동안 올해 쓴 글을 잘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한 해를 잘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https://brunch.co.kr/magazine/gapyearforme
게다가 나는 남들과 다르게 2019년 목표를 세웠었다. 1월초 제주에 가서 지인들과 버킷리스트 100개를 만들었다. 100개의 리스트는 2019년 한 해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정리했던 것이다. 버킷리스트 100개는 나의 숨겨진 욕망을 발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덕분에 나는 끊임없이 "성장"하고 싶다는 나의 욕망을 버킷리스트에 오롯이 담을 수 있었다.
한 해동안 나는 버킷리스트를 잊고 살았다. 다분히 의도적인 면도 있었다. 버킷리스트에 집착하다보면 그것에 연연할 것 같았다. 꼭 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는 건 싫었다.
무의식의 힘을 믿는 면도 있었다. 의도적으로 잊고 살지만 기록으로 남기는 과정에서 무의식은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고, 의식하지 않아도 버킷리스트를 실행하는 쪽으로 행동을 할 것이란 기대도 있었다. 작년에도 그랬으니까.
2019년을 정리하면서 그때의 버킷리스트를 다시 "까보려고" 한다. 그때 내가 만들었던 리스트를 확인해보고 얼마나 많이 실행에 옮겼는지 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때와 다른, 지금의 나의 욕망은 무엇인지도 비교하면 좋을 듯 싶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2019년을 정리할 수 있는 재료가 될 듯 싶다.
https://brunch.co.kr/@tham2000/22
2019년 나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을 알게 되었다. 자기혁명캠프, 성장판 독서모임, 리뷰빙자리뷰, 사람책, 내첫풀 등등의 모임을 통해서 "신기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닮고 싶은 사람도 만났고, 멘토도 만났다. 함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동지"들도 만났다. 내 인간관계의 주된 축을 이뤘던 "직장동료"의 비중이 많이 줄었던 한 해였다. 내가 자주 만나는 사람의 평균이 나를 나타낸다고 하던데,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평균이 확실히 달라졌다. (평균이 플러스 됐는지, 마이너스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2019년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을 나열해보고 정리하는 것도 2019년을 정리하는 좋은 방법일 듯 싶다. 새롭게 카카오톡, 페이스북, 인스타 친구가 된 사람들을 정리해보고 그들과 나와의 관계를 그려보는 것도 내가 어떤 2019년을 살았는지 알아보는 데 도움이 될 듯 싶다.
"놓치지 않을 거에요"
나에게 2019년은 그 어떤 해보다 소중한 한 해다. 울었던 날도 많았고, 성취감을 느낀 날도 많았다. 나를 돌아보며 지난날을 반성했고, (물론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지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많은 고민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2019년을 그냥 흘러보내기엔 너무 아쉬운 게 많다.
김희애씨가 한 화장품 광고에서 했던 말처럼 나 또한 2019년을 그냥 놓치고 싶지 않다. 내가 갖고 있는 좋은 재료들을 잘 보면서 12월 한 달 동안 잘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온 몸으로 2019년을 느끼고 마무리 하고 싶다. 잊을 수 없는 2019년, 오래도록 간직하고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