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각시별"이라는 드라마를 우연히 보게됐어요. 공항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인데요. 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어요. 명품 쇼핑을 하고 입국한 국회의원 딸이 세관에서 붙인 테이프를 화장실에서 떼고 변기에 넣으려다 공항 직원에게 걸렸고, 결국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게 되는데요. 이 장면에서 국회의원 딸이라는 여자의 "갑질"이 짜증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너 내가 누구 딸인줄 알아?"
이 말에 저고 모르게 욕이 튀어 나왔어요. 감정이입이 되었나 보더라고요. 하지만 드라마답게 일은 잘 마무리 됐어요. 국회의원 딸이라는 그 분은 화를 냈고 결국 직원들이 사과를 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됐는데요. 실랑이를 벌이고 뺨까지 맞았던 직원은 억울했지만 사과를 해야 했어요. 하지만 그 순간, 직원은 사과 대신 사이다를 날렸어요. “잘못은 그쪽이 하셨잖아요, 폭언도 폭력도 여객님이 먼저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사과해주세요!”라며 ‘일침’을 가했는데요. 속이 시원했어요.
하지만 그 장면이 머리에서 게속 맴돌더군요. 과연 그렇게 고객의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직원이 얼마나 될까 싶었어요. 아무리 고객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언제나 직원들은 "죄송합니다"를 외칠 수 밖에 없는 현실은 아닐까 싶었어요. 순간 우리 사회의 소위 말하는 "을"들이 눈에 들어왔어요. 저도 어디서 갑질하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됐고요. 그리고 몇 권의 '을'들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났어요.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을"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서 얻은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해 보려 합니다.
1. 임계장 이야기
처음으로 소개시켜드릴 책은 <임계장 이야기>입니다. 김민식 PD님 블로그에서 서평을 읽다 이 책이 눈에 꽂혀 읽게 됐는데요.
책 제목만 봤을 때 "임"씨 아저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요. 임계장 이야기는 성씨가 임씨인 이야기를 칭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임계장은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줄임말이라고 하는데요. 공기업을 38년 다니고 퇴직하신 분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버스회사 배차 계장, 아파트 경비원, 빌딩 주차 관리원 겸 경비원 등의 임시계약직 일을 하신 분이 자신의 경험을 정리해 만든 책이 <임계장 이야기>였어요.
책은 시작부터 가슴을 후벼팠어요. 번듯한 직장을 정년퇴직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문제로 새로운 직업을 택해야 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는데요. 주변에 퇴직하신 선배들도 생각났어요. 회사에서 30년 가까이 일하신 분들께서 퇴직하고서도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가야 했기에 경제적 부담감이 컸는데요. 가만히 앉아서 통장에서 쑥쑥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 오신다는 한 선배의 이야기가 책을 보는 내내 생각났어요. 그 선배도 한 달에 200만원이라도 벌었으면 좋겠다며 안타까워 하셨는데요. 열심히 회사에서 일만 하셨던 분들이었는데...
"임계장"의 삶은 고달펐어요. 상황은 열악했지만 고용주에게 불만조차 이야기 할 수 없었어요. 그랬다가 짤리기 십상이었거든요. 임시계약직을 원하는 노인장들이 많은 상황에서, 책의 저자와 같은 임계장은 일자리를 지키는 게 최우선이었죠.
나는 경비원들이란 화를 낼 줄 모르고 그저 순종만 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다. 다들 나이가 많아 갈 곳 없는 이들이어서 부당한 일에도 분노하거나 저항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들은 화를 낼 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참고 있었던 것뿐이다. <임계장 이야기 중에서>
글을 보며 생각난 분들은 역시 아파트 경비 분들이셨어요. 최근 아파트 재활용 분리수거 방식이 조금 바뀌어서 화요일 저녁마다 힘들게 박스의 포장 테이프를 뜯으시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는데요. 주변의 임계장님들을 볼 때마다 더 살갑게 인사하며 지내야겠구나 싶더라고요.
힘들다고 생각했던 나의 노동은 한낱 응석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부끄러웠다. 나보다 훨씬 힘들고 비참한 노동환경에서 조금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일하는 이들도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도 내 노동의 강도와 환경은 그대로지만, 이런 깨달음 덕분에 이제는 덜 힘들다. 이 점이 더욱 감사하다. <임계장 이야기 중에서>
지금도 여기저기서 고생하고 계실 임계장님들께 힘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2. 오늘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
두번째 소개할 책은 <오늘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라는 책입니다. 서강대교 근처에 살면서 수시로 이 다리를 건너는 저에게는 이 책의 제목이 저를 오싹하게 만들었는데요. 책 제목 만큼이나 내용도 저를 오싹하게 만들었어요.
이 책은 14년차 방송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요. 방송작가의 처우가 상당히 열악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작가의 생존기를 보면서 정말 심각하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최근의 상황은 많이 나아졌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을 수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크게 나아지진 않았을 거란 짐작도 됐고요.
사실 막내작가는 누구나 될 수 있었다. 학벌은 물론 그 흔한 토익 점수조차 안 보는 당시 몇 안 되는 직종이었다. 다만 박봉과 극심한 스트레스에 일년을 못 버티고 아예 바닥을 떠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은 막내작가에게 최저시급은 지키는 분위기다. 방송계의 열악한 환경이 언론에 많이 노출되었고 많은 이들이 싸워 온 덕분이다. <나는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 중에서>
열악한 상황에서도 작가의 열정만큼은 뜨거웠어요. 막내작가로 시작해 한 계단씩 올라가는 그녀의 커리어를 보면서 저도 모르게 함께 응원하기도 했고요. 몸이 망가져 버리는 바람에 일을 잠깐 쉬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함께 슬퍼하기도 했어요.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 그녀가 왜 이 책을 썼는지 알 수 있었어요. 그녀가 경험한 "을"의 세계를 사람들이 많은 분들이 공감해주길 바라는 것 같았어요.
내가 최선을 다했던 일이, 내 몸을 돌보지 못할 만큼 사랑했던 일이, 남 좋은 일로만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당한 대가를 받고 다시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든든한 토대가 갖춰지면 좋겠다. 그게 방송계든 어디든. 모든 직장인의 삶의 터전, 일터라면 말이다. <나는 서강대교가 무너지면 좋겠다 중에서>
3. 저, 청소일 하는데요
마지막으로 소개드릴 책은 <저, 청소일 하는데요>라는 책이에요. 이 책은 젊은 여성이 4년 동안 "청소일"을 하면서 보낸 시간들을 정리해 담았는데요.
작가는 청소일을 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그 일을 하는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참기가 많이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왜 젊은 여자가 청소 일을 하는지, 그리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 듯 싶었어요. 역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지랖이 참 넓죠?
그녀는 그 시간을 견뎌냈다라고 표현하더라고요. 책을 내고 강연을 하고 한 질문을 받았다고 해요. “남의 시선을 어떻게 이기나요?”라는 질문이었는데요. 작가는 이겼다기 보다는 견뎠다며 담담히 이야기해요. 4년 이란 시간동안 사회적 편견을 견뎌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지 그녀가 안쓰럽게 느껴졌어요. 동시에 견딘다는 표현이 색다르게 들렸어요. 견딘다는 표현이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게 우리네 현실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싶었어요. 우리가 지금 보내는 시간도 무엇을 이겨내는 시간이라기 보다는 견뎌내는 시간이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프롤로그에 나온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는데요.
“보편적이지 않은 일을 선택하면서 많은 편견을 만났습니다. 그 편견은 타인이 만들어준 것도 있었고, 저 스스로 만들었던 것도 있습니다. 좋고 싫음을 떠나 소수의 삶은 조금 외로웠습니다. 그렇지만 누가 보기에도 보편적이지 않은 ‘청소일’은 이내 저에게 보편적이지 않음 ‘삶’을 선물해 줬습니다. 가끔은 익숙하지 않은 길로 돌아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 다르게 살아보니, 생각보다 행복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좀 다르면 안되나요?” <저, 청소일 하는데요 중에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어요. 어떤 일을 하든 그것에 대해 누구도 자신의 잣대로 평가하지 않았으면 해요.
몇년 전 콜센터 상담원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준 캠페인 광고를 본 적이 있어요. 콜센터에 전화를 걸었을 때 통화 연결음을 상담원의 딸이, 부모가, 하는 말로 변경한 캠페인이었는데요. 연결음을 바꾸면서 콜센터 상담원들에게 하는 언어 폭력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주변에 수많은 "을"들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갑"이 될 때도 있고, "을"이 될 때도 있는데요. "갑"인 위치에 있을 때 너무 갑질을 안했으면 좋겠어요. 우리에게 좋은 서비스를 주는 사람들이 우리의 형제, 자매요, 부모님이라고 생각하고 대해주었으면 좋겠어요. 따뜻한 마음으로 인사를 하며 감사의 마음도 표현했으면 좋겠고요. 그게 우리가 “을”이 됐을 때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이 될 수도 있을거고요.
우리, 갑질하진 말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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