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달릴 때 얻는 이것
지난 금요일 저녁 때의 일이다.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저녁이 되니 살짝 날이 갰다. 이때다 싶어 퇴근하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한강으로 나갔다.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꼭 달리기가 아니더라도 천천히 산보라도 하면서 "편안하게" 한 주간을 정리할 요량이었다. 괜히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계획은 안타깝게도 1km를 달리고 나서부터 급격히 무너지고 말았다.
첫 1km를 달리는데 몸이 가벼웠다. 출발할 때만해도 두 다리에 한 주 동안의 피로가 덕지덕지 들러 붙어 있었는데, 달리기를 하면서 그 피로가 도망간 듯한 느낌이었다. 얼마 전 산 신발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 한발짝 한발짝 뗄 떼마다 나를 공중으로 더 세게 끌어 올려 주었다. 올림픽을 너무 열심히 봐서였는지 나도 모르게 올림픽 정신에 입각해 더 빠르게 더 멀리 달리고 있었다.
결국 10km를 50분도 채 안되는 기록으로 뛰어 버렸다. 중간에 멋진 노을도 사진도 못 찍은 채 온 몸에 땀 범벅이 된 채 그렇게 나는 출발지로 다시 돌아왔다. 달리기를 하면서 떨어져 나갔던 피곤들도 다시 내 몸에 들러 붙었다. 그야 말로 내 몸은 만신창이였다. 온 몸이 뻐근했고 근육은 놀라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기분은 좋았다. 몸은 아니라고 신호하는데 마음만은 산뜻했다.
어쩌자고 나는 그렇게 무리하게 전속력으로 달렸을까? 그리고 나는 왜 기분이 좋았을까?
물론 좋은 기록으로 먼 거리를 달렸다는 뿌듯한 마음도 있었다. 달리기를 하면서 한 방울 한 방울 적립하고 있는 성취감을 이날도 몇 방울 적립했다. 열심히 뛴 스스로가 대견했다. 게다가 올해 세운 목표에도 점점 다가가는 것도 나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목표로 한 2050km의 고지가 슬슬 보이기 시작하니 뿌듯했다.
하지만 나의 기분 좋은 감정은 단지 먼 거리를 빠르게 달렸다는 데서 오는 "성취감"이나 목표를 채워간다는 데서 오는 "보람"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오히려 "비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뭔가 감정이 많이 정리된 듯했다.
달리기를 시작할 때는 이런 저런 생각이 난다.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도 생각나고 산더미같이 쌓인 해야 할 일들도 떠오른다. 좋은 글감을 어떻게 정리할 지도 궁리한다. 하지만 달리기 속도를 높이면 높일수록 이런 생각들이 하나 둘 사라지게 된다. 아니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호흡을 가다듬고 빠르게 달려야 하기에 오로지 한 걸음 한 걸음에 그리고 들숨과 날숨에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달리기만 생각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달리기 전에 들었던 이런 저런 생각들을 어느새 잊어 버리게 된다. 아니 할 수 없게 된다. 물론 회사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누군가 대신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잠시 잊고 지낸 시간들이 나의 마음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잠시 벗어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힐링이 된달까?
당장 처리해야 할 일에 집중하다 보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 해야 할 일에 정신이 날카롭게 쏠리면 다른 부차적인 생각과 걱정은 전부 사라진다. ... 지금 이 순간을 오롯이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
달리기, 몰입의 즐거움 p.30~31
칙센트 미하이의 책 <달리기, 몰입의 즐거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달리기에 몰입한 그 순간, 그것이 짧든 길든 그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드는 순간 그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기분이 든다. 덕분에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해서든 해결할 수 있는 약간의 용기 또한 갖게 된다. 그것이 비록 무모한 용기일지라도 말이다.
그래서 내가 빠르게 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천천히 달릴 때 얻지 못하는 몰입의 상태에, 빠르게 달리기를 하면서 다다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무모함도 좋다.
나는 이것이 달리기가 주는 명상효과가 아닐까 싶다. 오로지 달리기에 집중함으로써 나의 상념들을 덜어 버리는 것이야 말로 명상에서 나 자신에 집중하는 것과 같은 이치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의 몸과 대화를 나누며 내 몸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은 달리기가 주는 또다른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매력은 나의 에너지를 한껏 발산하여 빠르게 달리는 순간에 나에게 더 확실하게 다가오는 듯 하다. 빠르게 달릴 때 내 몸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되니까.
물론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빠르게 달렸는데도 생각이 지워지지 않을 때도 있다. 나를 짓누르고 있는 스트레스의 무게가 너무 클 때에는 달린다고 생각이 사라지진 않는다. 달리기에 집중할 수 없다. 그러다 보니 더 빠르게 달릴 수도 없다.. 그러니 자꾸 딴 생각이 나는 악순환이 계속 된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지극히 예외적인, 너무 힘든 때다. 너무 힘든 때에는 사실 어떤 것을 하더라도 집중하기 어렵다. 그럴 때에는 차라리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리는 게 나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스트레스의 무게가 자신을 압도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리고 일상에서 잠시 일탈하고 싶은 경우라면 나는 한 번쯤은 빠르게 달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헉헉 거리며 달린 후, 가벼운 상태를 한 번 느껴봤으면 한다. 분명 머리가 맑아지는 신기한 기분이 들 것이다. 비록 몸은 힘들지언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