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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호진 Mar 07. 2022

마이크를 잡고 행사 사회를 봤습니다.

사회를 보면서 행복감을 느끼다.

행사 사회 볼래?


퇴사 후 얼마 되지 않아 회사 선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스타트업 협업 프로그램의 데모데이 사회를 봐달라는 이야기였다. 원래 외부 진행자를 섭외하는데 내가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게 선배의 이야기였다. 스타트업과 협업도 직접 해봤고 회사 사정도 알기에 일반 사회자보다 내가 훨씬 더 나을 것 같다며 말이다.


선배의 제안이 고마웠다. 회사를 나간 후배를 챙겨주는 마음도 감사했고, 내가 사회를 보는 것을 좋아하고 이런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알아준 것도 감동이었다. 고민도 하지 않고 무조건 해보겠다고, 아니 하고 싶다고 선배에게 말했다. 


윗 분들께 보고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틀어질까 걱정했는데 별탈 없이 내가 맡게 되었고 두 번 정도 사전 미팅을 한 후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정장을 입고 구두를 신고 머리도 말끔하게 정리한 후 행사장으로 갔다. 설레는 마음으로.


좋지만 부담되는 자리


막상 현장에 서니 부담감이 훅 하고 밀려왔다. 나에게 일부러 이런 자리를 마련해 준 선배가, 괜히 나 때문에 피해를 보면 어떻게 하나라는 걱정이 올라왔다. 안전하게 전문 사회자를 맡겨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일부러 나에게 기회를 준것이다. 그러니 더 잘해야 되는 자리였다. 물론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오히려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지만 그래도 잘해보고 싶었다. 


게다가 회사의 사장님 및 임원들 그리고 다른 많은 분들이 오시는 자리였다. 그것도 모자라 스타트업에게는 자기네들의 성과를 알리는 중요한 자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너무 가볍게 이 자리를 생각한 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무턱대고 해보겠다고 한 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엎질러진 물이고, 쏘아 버린 화살이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올라오는 걱정을 발로 뻥하고 차버렸다.  


리허설을 하는 내내 혀가 꼬이고 뭔가 부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걱정을 발로 차버렸다지만 그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 듯 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사회자는 행사의 윤활유 같은 역할로 충분하다 생각하고 행사가 시작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역시나 나는 관종인가?


드디어 행사가 시작됐다. 많은 내빈들께서 자리에 앉고 온라인으로도 영상이 송출됐다. 그리고 긴장된 마음으로 행사의 시작을 알렸다. 처음엔 떨렸다. 마스크 때문인가? 뭔가 말이 입안에서 헛도는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행사가 진행되면서 나는 평온을 찾을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마이크를 잡고 사람들 앞에서 행사를 보는 것을 나는 즐기게 되었다.


처음 약간 어버버했지만 중간부터는 스타트업들의 이야기도 귀담아 들으며 행사를 즐겼다. 중간 중간 애드립도 치고, 자연스럽게 행사를 진행했다.(물론 어디까지나 내 기준이다) 적당히 유머도 집어 넣고 싶었지만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들 너무 엄숙하게 보셨기에 괜히 재밌자고 농담했다가 낭패를 볼 것 같았기에 최대한 안전하게 진행했다. 


두 시간 넘게 행사를 진행했다. 오랜만에 입은 정장과 딱딱한 구두가 몸을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행사를 보는 내내 너무 즐거웠다. 내가 뭘 발표한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야기를 하는 그 순간이 너무 행복했다. 


소개해 준 선배가 회사 내부에서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나 때문에 핀잔을 들은 건 아닌지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80점 이상의 행사였다. 꽤 괜찮게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가장 큰 것은 내가 행복했다는 점이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는 것 자체로도 몸은 피곤했지만 흥분은 오래도록 지속됐다. 다른 분들도 별 말 없는 거 보면 나쁘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라고 정신승리를 해본다)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


집에서 혼자 여운에 빠져 있다 보니 5년 전 나를 일깨웠던 회사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당시 미국 출장을 다녀온 후 나와 동료들은 회사 임원들이 다 모여있는 자리에서 출장에 대한 인사이트를 발표하게 됐다. 열심히 준비했고 한 명씩 출장의 결과물을 리뷰했다.  마지막 차례는 나였다. 긴장된 채 단상에 올랐고 그동안 준비했던 것들을 최선을 다해 발표했다. 


발표가 끝나고 뒷풀이를 하는 자리에서 동료는 나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너 참 행복해 보이더라" 


발표를 하는 내 모습이 참 행복해 보인다는 동료의 말은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당시 심한 무기력에 빠져 있던 나에게, 행복이라는 말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것이 확실한데 그것을 제대로 못해서 내가 무기력에 빠진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의 말 때문이라 할 수는 없지만 내 변화에 있어서 동료의 그 한 마디는 큰 지렛대 역할을 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내가 좋아하는 일, 내가 즐길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을 계속하고 싶어서 퇴사까지 하게 됐다. 그런 몇 년간의 과정이 순간 떠올랐다. 그리고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던 동료의 그 한 마디가 새삼스레 감사했다. 


그리고 행사를 복기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우연과 마주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날 행사의 시작점은 5년 전 우리가 갔던 출장이었다. 그 때 발표했던 것들이 스타트업과이 협업으로 이어졌다. 물론 그 때 발표했던 사람들은 (나포함) 다 도망가고 그것을 꾸려 나갔던 (사회를 추천한) 선배의 개고생 덕이었지만 발표를 하며 행복했던 순간이 5년 뒤 사회를 보는 행복감으로 연결되는 게 신기했다. 이렇게 연결될 수도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점을 찍으며 즐기는 삶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문은 시간이 꽤 지났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명연설이다. 그는 "connecting the dots"를 언급하며, 점과 점이 어떻게 연결될 지 모르기에 많은 점을 다양한 곳에서 찍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퇴사를 하고 나서 보니 잡스가 말한 "점"의 위력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내가 지난 몇 년간 찍었던 점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는 경우들을 보면서 그냥 허투루 찍었던 점은 없었다는 것을 느낀다. 때로는 그 점이 고통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돌이켜 보면 나에게는 의미 있는 값진 경험들이다. 그것들이 새로운 경험이 되고 수익원이 되기도 한다. 


이번에 진행했던 사회는 그런 의미에서 값진 "점"이었다. 다소 긴장하긴 했지만 너무 재밌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과거의 새로운 점을 소환할 수 있었고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점이 어떤 점과 어떤 방식으로 연결될 지 기대된다. 물론 그것이 어떤 선으로 연결될 지는 알 수 없고 일부러 선을 긋는다고 그어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냥 기대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히 값진 점이었다. 그래서 더 감사하고. 


사회를 본 지 몇 주 지났지만 아직도 그 여운이 남아 있어 글로 남겨본다. 다양한 곳에서 점을 찍는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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