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잊어버린 덕분에...
작년에 미라클 모닝을 읽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삶이 궁금해졌다. 마녀체력을 읽으며 철인삼종경기는 못해도 마라톤을 해보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달리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난생처음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
작년 11월 JTBC 서울 마라톤 대회였다.
한 달 넘게 헬스장에서 몸을 만들며 10km 마라톤 대회에 준비했다. 사람들에게 마라톤 대회에 나간다며 1시간 이내에 들어오겠다고 선언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나갔던 마라톤 대회였다. 생각보다 1시간 이내에 들어오는 게 힘들었다. 7km쯤 갔을 때 도대체 나는 왜 여기서 달리기를 하고 있는건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굳이 편한 길도 있는데 고생을 사서하는걸까? 건강 때문이라고? 아니면 고통을 즐기는 메조히스트인가?
다행히 그날 나는 1시간 이내에 도착지점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승리의 기쁨에 도취되었다. 뭔가 해 냈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1단계 레벨 업을 한 것 같았다. 보통 마라톤을 하려면 10km는 1시간 이내에 들어와야 한다는데, 그 경계를 넘어선 기분이었다. 분명 30분 전에 나는 고통을 즐기는 나에게 회의감을 느꼈는데, 성취감에 도취된 나머지 다음 대회를 기약하게 되었다. 분명 난 기억력이 좋은 사람인데, 금세 고통스러운 순간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깟 달리기가 뭐라고!
휴직을 하고 나는 새벽마다 달리기를 했다. 꼭 마라톤 대회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건강을 위한 것도 아니었다. 서울의 미세먼지를 다 먹고 달렸으니까. 그냥 달리는 게 좋았다. 그리고 4월 경주에서 열리는 벚꽃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 즐기며 달리기를 한 덕분에 경주 벚꽃 마라톤 대회에서는 쉽게 달릴 수 있었다. 벚꽃마라톤 대회에서 벚꽃은 보지 못한채 아스팔트만 보고 달려 아쉽기는 했지만, 작년 11월처럼 숨이 막히고 다리가 아파오진 않았다. 그리고 목표로 세운 40분대 도착이라는 기록을 세울 수 있었다. 자신감을 얻었다.
이젠 10K는 껌이구먼!
자신감이 아니라 자만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2단계로 점프해 보고 싶었다. 하프 마라톤에 도전하게 됐다. 10Km의 두 배가 넘는 21km를 뛰는 하프 마라톤 대회에도 쉽게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미 경주에서 자신감 아니 자만심을 장착한 터라, 괜찮을 것 같았다.
하프 마라톤을 위해 연습을 시작했다. 물론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새벽마다 혼자 뛰었다. 매일 뛰는 거리를 늘려갔다. 가끔씩 10km 이상 뛰기도 했다. 12km도 뛰어보고 15km도 뛰어봤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못 뛸만큼은 아니었다. 하프 마라톤도 잘 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마라톤에 2단계를 뛰어넘을 시간과 장소가 정해졌다. 5월 26일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이었다. 벤츠에서 시행하는 기브앤레이스 마라톤 대회에 나갔다. 상암에서 양화대교를 지나 여의도까지 가는 구간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공간이라 친숙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대회 당일 생각보다 컨디션이 좋지는 않았다. 전전날 등산과, 전날 수영으로 몸이 많이 뻐근했다. 등산을 하고 수영을 하고 달리기를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그동안의 연습이라면 하프도 여유있게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역시 자만심이 장착된게 맞았다. 조금 무겁게 몸을 풀었고, 출발 총성이 울렸다. 드디어 마라톤 2단계를 위한 하프마라톤 대회에 첫 발을 내디뎠다.
첫 발을 내딛고 처음으로 생각난 게 있었다. 언제 21km를 다 뛰냐는 것이었다. 1km씩 총 21번을 뛰면 된다고 생각하니 너무 아득해 보였다. 출발과 동시에 자만심이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달리기 시작과 동시에 제대로 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기존의 10km 마라톤 대회 참여자와 확실히 달랐다. 다들 달리기 좀 하신 분들 같았다. 복장이며, 신발이며 모든 것들이 달리기 좀 해본 포스였다. 실제로 잘 달리기도 했다. 내가 달리고 있으면 하나, 둘씩 나를 앞서 나갔다. 마라톤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했건만 남들이 나를 제치고 달려가니 오기가 생겼다. 속도를 냈다. 오버 페이스를 했다. 1km를 4분 30초대에 달려 버렸다. 1km를 5분 15초 정도에 뛰겠다는 목표였는데...
초반에 과도하게 뛴 게 몸에서 나타났다.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6km구간을 넘어서면서부터 숨을 쉴때마다 아팠다. 잠깐 쉬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버텼다. 지금 쉬면 완주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달리다 멈추면 더 고통스럽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했다. 다행히 버티다보니 통증이 줄어들었다. 9km 쯤 다다랐을 때 몸이 조금 풀렸다. 이때다 싶어 열심히 달렸다. 한동안 페이스가 좋았다. 하지만 더운 날씨 덕분에 땀이 흐르면서 점점 지쳐가기 시작했다. 16km를 넘어가면서부터 힘에 부쳤다. 가장 오래 달린 게 16km였으니 그 이상 달리는 게 힘든건 당연했다. 그때부터 내가 왜 하프마라톤에 도전했나 후회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지금, 여기에서, 뛰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후회를 하며 겨우 겨우 달리고 있는데 블로그 이웃의 말이 순간 생각났다. 하프 마라톤을 뛰고 오셨다며, 본인의 기록이 좋지는 못했지만, 걷지는 않으셨다는 이야기였다. 내가 하루키의 책을 보며 인용한 말이기도 했다. 그 순간부터 후회고 뭐고 다 필요 없었다. 그냥 걷지 않기만을 바라며 뛰었다. 속도가 나진 않았지만 걷지 않고 싶었다. 내가 뱉은 말이니 나도 걸을 순 없었다.
걷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는 포기하지 않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사람들이 걷고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나 또한 걷고 싶은 충동이 들곤 했었지만, 나 자신이 세운 원칙을 그리고 사람들에게 뱉은 것을 실천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누가 보는 건 아니었지만 스스로에게 당당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오기로 버티며 뛰었다. 그리고 어느새 여의도 공원 입구에 들어설 수 있었다. 힘차게 여의도 공원을 지난 후 드디어 골인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지막엔 죽기 살기로 뛰었다. 그 땐 오히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한 번도 걷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1시간 48분05초
2시간 이내에 들어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기록이 좋게 나왔다. 너무 힘들었다. 아직까지 나에게 하프마라톤은 무리였나 싶었다. 다음 도전을 기약하기엔 힘들다는 생각 뿐이었다.
나눠준 파워에이드를 한숨에 들이키고, 간식을 받아 먹고, 간단하게 마사지를 받으니 심신이 안정을 찾아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갑자기 집나갔던 "보람과 성취"가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해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후회하며 힘들다고만 생각했었는데 나의 목표를 이뤘다는 것에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기기기도 했다. 내가 너무 사랑스러웠다.
갑자기, 다시 또 마라톤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는데, 나는 5분만에 마라톤이 주는 기쁨에 다시 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고통스럽게 겨우 겨우 달렸던, 도로에서 쓰러지고 싶었던 그 때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2시간 안에 도착한 그 기쁨만 남게 되었다. 파워에이드의 꿀맛만 느껴질 따름이었다. 다음 하프 마라톤은 언제가 좋을지, 그리고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지, 머릿속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번엔 오버하지 말고 잘 달려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매일 달리고,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내가, 물론 그래 봤자 얼마 안됐지만, 왜 달리기를 계속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생각보다 잘 잊어버려서 그러는 것 같았다. 달리기를 하면서 느낀 고통과 후회를 달리고 나서 금세 잊어버리기 때문에 계속 달리는 것 같았다. 도착하며 느끼는 보람과 성취가 고통과 후회를 사라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이날은 특히 도착하며 마신 파워에이드가 꿀맛이었다. 도착지에서 쭈그리고 앉아 파워에이드를 마시는데 그 순간은 세상을 얻은 기분이기도 했다. 아마도 그 꿀맛이 나의 뇌에 환각 작용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다시 파워에이드의 맛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 일었는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그게 뭐라고! 근데, 그건 편의점에서는 살 수 없는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