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나에게 잘하고 있다고 위로해 주었다.
"지자요수, 인자요산" 어려서부터 이 말을 좋아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라는 말을 보며, 나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물을 좋아하는 나 자신을 합리화하기도 했다. 어진사람이 되기는 글렀다며 산은 나와 태생적으로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이 문구는 지혜로운 자와 어진 자의 성향에 대해 아래와 같이 부연하여 설명한다.
공자가 말했다.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어진 자는 산을 좋아하며,
지혜로운 자는 움직이고 어진 자는 고요하며,
지혜로운 자는 즐기고 어진자는 오래 산다
(智者樂水, 仁者樂山, 智者動, 智者樂, 仁者壽).”
동적이며, 즐기는 사람인 내가 물을 좋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여행지도 당연히 바다가 우선이었다. 힘들게 산을 오르내리는 것은 싫었다. 편안하게 바다를 바라보는 것이 좋았고, 물 속에서 신나게 노는 게 즐거웠다. 아이들과 함께 하면서 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커진 듯 하다. 산에 가는 일은 설악산에서 케이블카를 타는 게 전부였다.
그랬던 나였는데, 휴직을 하고나서 사람이 변했다. 산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산이 자꾸 내게 손짓하는 것 같았다. 한 번 와서 보라고. 난 분명 지혜로운 사람인데 어진사람은 아닌데 말이다.
휴직을 하고 1월 초 한라산에 갔다. 다소 충동적으로 휴직원을 냈고, 도망치듯 제주 여행을 갔다. 그리고 눈 덮인 한라산에 올랐다. 장장 8시간 동안 올랐다. 미친 짓이라 생각하면서도 꾸역 꾸역 올라갔다. 인생에서 가장 긴 코스의 등반이었다.
한걸음 한걸음 올라가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게 됐다. 같이 간 동료와 대화를 나누며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한라산 정상에 올랐을 때, 백록담을 바라보며 감동을 느꼈다. 사진 속에서 자주 본 백록담이었지만, 눈으로 직접 보니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백록담은 나로 하여금 많은 다짐을 하게 만들었다. 아이들과 아내에게 좀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을 수 있었다.
"힘들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하산할 때는 더 힘들었다. 올라온 것 이상으로 힘이 들었다. 점점 백록담의 감동이 희미해지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머릿속을 맴도는 문구가 있었다.
No pains, No gains.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는 이야기를 산이 나에게 하는 것 같았다. 분명 힘든 만큼 느끼는 바도 많았다. 편안하게 케이블카를 탈 때는 얻을 수 없는 감동을, 등산을 하며 느낄 수 있었다. 성장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장하기 위해 따라오는 성장통은 당연한 것일텐데 왜 나는 아픈 것을 싫어하고 피했는지 반성이 되기도 했다. 가만히 있으면 성장할 수 없다. 힘든 과정을 견뎌내는게 필요했다. 물론 그렇다고 고통을 즐기는 사람이 되겠다는 "이상한" 생각을 한 건 아니었다. 다만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다짐했을 뿐.
하산 후 숙소에 들어가면서 산에 또 올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돌아가면 좋아하는 사람들과 등산을 하며 산이 나에게 들려주는 또 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등산화를 일회용품으로 만들지 말아야겠다는 절실함도 한 몫했다. 10만원 넘게 주고 산 등산화인데 한번 신고 말 수는 없었다.
하지만 등산화는 한동안 신발장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하는 신발의 욕구를 나는 애써 외면했다. 휴직 후 산에 오를 기회는 많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을 내어 산에 가기 어려웠다. 뭐가 그리 바빴는지, 타이밍을 놓치곤 했었다.
산 오르기 좋은 봄날이 다 지나고 나서야 드디어 산에 올랐다. 꽃은 다 지고, 여름이 성큼 다가온 5월 말이 되어서야 말이다. 30도가 넘는 초여름 날씨에 그렇게 등산을 하게 됐다. 이번 등산은 얼마전 참여한 "터닝포인트" 워크샵에 함께 했던 사람들과 같이 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위해 스스로를 돌아봤던 워크샵 멤버들이라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정이 든 사람들이었다. 1인 기업가 선생님을 중심으로 퇴직자 휴직자들에 휴가자까지 합세해 평일 낮에 산을 탈 수 있었다.
이번 산은 "수락산"이었다. 오전 11시에 노원역에서 만나 우리는 산으로 넘어갔다. 평일 산행은 새로웠다.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산을 통째로 빌린 느낌이었다. 한 분의 말씀이 인상적이었다.
"서울에서 주말에 산에 올라가면 결국 보는 것은 앞사람 엉덩이 뿐이다"
산을 오르는 것인지, 사람들에게 떠밀리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하지만 평일의 산은 너무 고요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다. 온전히 산에 그리고 같이 함께 하는 사람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
힘겹게 산을 올랐다. 그리고 정상에서 자리를 펴고 김밥도 먹고, 막걸리도 마셨다. 막걸리는 정말 시원했다. 두 잔 마시고는 얼굴이 벌개지고 기분도 알딸딸했지만 덕분에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김밥도 맛있었다. 무겁게 들고온 사부님(터닝포인트 워크샵 주최하신 오병곤 선생님을 우리는 사부님이라고 부른다)의 배려가 담긴 김밥이어서였는지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그렇게 즐겁게 이야기를 듣고 산 정상에서 음악도 들으며 산이 주는 기쁨에 우리는 심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상기된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조금 가파른 코스로 내려온 덕에 금세 내려올 수 있었다. 더워서 땀이 비오듯 쏟아졌지만 또 다시 산을 기약할 정도로 즐거운 산행이었다.
산을 타면서 얼마 전 읽은 책 "걷는 사람, 하정우"가 생각났다.
"비가 오면 우산을 쓰고 추워지면 외투를 입는 것처럼 나는 기분에 문제가 생기면 가볍게 걸어본다. 누구에게나 문제가 없는 날은 없고 고민 없는 날도 없다. 고민이 내 머릿속에 슬금슬금 기어나와서 어깨 위에 올라타고 나를 짓누르기 시작하면 나는 '아 모르겠다. 일단 걷고 돌아와서 마저 고민하자' 생각하면서 밖으로 나간다.
걸으면서 고민을 이어 갈 때도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걷는 동안에는 어쩐지 그 고민의 무게가 좀 가벼워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하정우에게 걷는 것은 고민을 덜어내는 행위이자 의식이었다. 힘들다고 느껴질 때 걷는 것으로 그는 많은 위로를 받는 듯 했다. 등산을 하면서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물론 함께 하는 사람들이 주는 힘도 컸다. 하지만 걷는 게 없었다면 그렇게 큰 위안을 얻지 못했을 것 같았다. 터벅 터벅 걸으면서 마음이 단순해지는 게 느껴졌다. 고민이 해결되는 것보다는 그냥 지금 이 순간이 즐겁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매일 아침 달리면서 비슷한 경험을 한다고 생각했었다. 분명 달리면서도 많은 고민들이 알아서 해결되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쉼없이 달리면서 놓치고 있는 것들이 분명 있었는데 산을 걸으면서 놓치고 있는 주변의 풍경들 덕분에 조금은 천천히 가는 것도 의미있는 방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달리는 것과 걷는 것은 확실히 달랐다.
그 순간 오병곤 선생님이 내게 한 마디를 건네주셨다.
달리는 것이 성취라면, 걷는 것은 힐링이다
격렬히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달리는 것을 통해 나는 “이뤘다는” 마음으로 고민을 해결했다면, 걷는 것을 통해 나는 “잘하고있다”는 마음으로 위로 받고 있었다. 이날은 산이 내게 조용히 위로해주는 것 같았다. 지금 괜찮게 잘 지내고 있다고 말이다.
많은 위로를 받았다. 산이 내게 위로를 해 주었고, 함께한 사람들이 미소로 응원해주었다. 평일에 이렇게 조용히 산을 다녀올 수 있어 좋았다. 휴직하고 나에게 좋은 시간들이 다가와주고 좋은 장소들이 다가와주고 좋은 사람들이 다가와주어서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시간, 공간, 인간 이 세 간(間)이 얼마나 소중한 지 알 수 있는 즐거운 산행이었다. 점점 나도 인자한 사람이 되어가나보다. 다음 산행을 기대하는 걸 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