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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불구하고 Jun 04. 2020

나는 별일 없이 산다

SNS 심리학에 부쳐 

몇 년 전 '디지털 심리학'이 뜨겠군 하고 생각했는데 오늘 아침 신간 소개를 보다가 <페이스북 심리학>이라는 책이 나온 것을 발견하고 그럼 그렇지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과 상담의인 저자가 3년간 사람들을 인터뷰하며 소셜 미디어의 심리적 영향을 연구 분석하였다고 하니, 그래, 이제 나올 만도 하지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어디 페이스북뿐인가. 소셜 미디어의 대표주자 트위터와 블로그도 마찬가지이다. 관계 맺기,라는 오묘한 소셜 미디어의 다이내믹은 현대 인간 심리를 파고들어가 헤쳐보는 재미를 쏠쏠하게 제공할 수 있는 보고 아니던가. 게다가 소통이라는 미명하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것처럼 보이는) 상호작용은 ‘권력’의 메커니즘과 상당히 닮아 있더라. 


트위터를 처음 시작하던 2010년만 해도 나는 뭐 이런 신통방통한 게 다 있나 감탄해가며 140자 안에 할 말을 꾹꾹 눌러 담아 내는 것이 일종의 문장 응축 연습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내 안의 문자를) 배설하지 않고는 살 수 없겠다 싶을 만큼 정신적인 허기에 몹시 시달렸던 때라 초반엔 열심이었다. 열심히 해야겠다, 싶어서 한 게 아니라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살짝 미칠 것 같아서 그리 했다,라고 하는 편이 더 낫겠다. 사람은 역시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군, 하며 말이다. 그러니까 나 같은 사람에겐 일종의 배설 창구였던 것이다. 독백(獨白)을 가장한 방백(傍白) 말이다. 


소셜 미디어라는 게 그렇다. 무대 위의 주인공이라곤 달랑 나 하나뿐인 1인 모놀로그인데 그렇다고 관객을 의식하지 않을 수는 없는 연극 무대와 같다. 아무 말이나 지껄이고 싶고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도 관객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익명성의 그늘에서 게릴라 작전을 수행하듯 매복과 습격을 일삼는 디지털 테러리스트가 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리하여 모놀로그는 ‘자기 성찰’ 쪽으로 방향을 잡거나 혹은 (수용 가능한 범위 내에서의) ‘사회 비판’을 골자로 하는 개미 논객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이도 저도 아니면 정말 이도 저도 아닌 잡다구레한 신변잡기 혹은 감정 부산물의 하치장이 된다. 물론 (사회적으로) 좀더 유용하고 세련된 형태의 것도 있다. ‘전문성’과 ‘통찰력’을 장착한 컨텐츠로 특화되는 경우이다. 경제, 경영, IT, 예술, 철학, 문학, 의학, 심리, 문화, 교육 등등. 카테고리로 나누자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사실 새로운 디지털 혁명에 나는 별 관심이 없었다. 거의 10년 전, 일본의 한 홍보 대행사가 Web 2.0에 대하여 내게 간략하게 프리젠테이션을 해준 적이 있었다. 나의 반응은 시큰둥한 호기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후로도 커뮤니케이션을 업으로 먹고 사는 사람이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몰라서야 되겠느냐는 주변 분위기에 휘말려 시큼털털한 마음으로 트위터와 페이스북 계정을 만든 것이 발단이 되었다. 페이스북은 만들어놓고 쓰지도 않았고, (당시 으레 그랬던 것처럼) 트위터 중심으로 탐색이 시작되었다. 몇몇 아는 지인들을 시작으로 팔로잉(following)과 팔로워(follower)가 늘어갈 때는 이게 마치 무슨 인맥 자산이라도 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처음엔 업무적 이해를 위해서, 다음엔 개인적으로 배설하고 숨통 트고 살고자, 더 지나서는 인간들이 맺는 디지털 네트워크의 요지경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 있어서, 그 다음엔 ‘생각 압축’이라는 의도적 연습의 목적으로, 나중엔 그냥 내 멋대로-되는 대로-손 가는 대로 끄적이는 플랫폼 하나 정도는 있어도 좋겠다 싶은 생각에, 그렇게 나름의 단계를 거쳐 지금까지 사용해 왔다. 


디지털 세계에서 펼쳐지는 관계의 요지경은 상당히 흥미로웠는데, 그건 마치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는 듯했다. 그러니까 “얘야, 우리가 사귀어야 할 사람은 우리와 사귀고 싶어 죽겠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사귀고 싶어 죽겠는 사람이어야 한단다”라는 식의 현대판 사교 노력이 고스란히 드러난다고 해야 하나. 


나를 알아주었으면 하는 사람과 (온라인상에서나마) 관계를 맺는 것이 작은 성취인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으니, 아마도 이것은 내가 몸 담고 있었던 바닥의 생리에 한해서일 수도 있다. 순수한 인간적 호기심이나 취향 및 관심사의 공유,보다는 비즈니스 혹은 사회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냐 아니냐에 따라 빠르게 계산되고 이루어지는 관계 맺기를 내가 더 많이 보아온 탓도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내가 그리 삐딱하게 본 것일 수도 있겠다. 아무래도 비즈니스 이해 관계와 인맥이 얽히고설킨 곳이다 보니 말이다. 내가 즐겨 표현하는 것처럼, ‘다 그런 것은 아니어도 대체로’ 그렇게 보였다는 말이다. 


소통이라는 미명 아래 펼쳐진 수평적(인 것처럼 보이는) 네트워크 안에는 엄연히 사회적 위계질서와 권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 미묘한 심리적 역동관계를 미세하게 잡아 낼 수만 있다면 21세기 풍자 소설의 소재로 삼아도 손색이 없겠다 싶을 만큼. (이런 쓸데없는 생각도 하며 살았다.)    


때로 내가 너절하게 늘어놓은 말들에 리트윗이나 관심글 저장(페이스북의 좋아요,나 블로그의 공감,과 같은)의 표시가 뜨면, 혹은 멘션(페이스북이나 블로그의 댓글)을 받으면 나름 좋기도 하고 그랬다. 나름 인지도 높은 트위터리안이 나를 팔로우하거나 내 타임라인에 멘션이라도 날릴라치면 그날 하루 팔로워(follower) 수가 조금이나마 늘어나는 것을 숫자로 확인할 수 있었다(그래 봤자 거기서 거기, 얼마 되지도 않지만).

 

어차피 (요즘 소셜 미디어의 폐해로서 나타나는) ‘보여주기 일상’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것은 아니어서 ‘반응’이 있든 없든 별 동요 없이 무덤덤하게 나의 필요에 따라 트위터를 사용했다. 

그래도 가끔씩 이게 다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한 지인의 말처럼 “나르시시즘(Narcissism)과 관음증(Peeping Tomism)”이 절묘하게 결합된 이 심리적 놀이터에서 나 역시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에 기가 막히기도 했던 것이다. 

그래도 뭔가를 주절대거나 (각계각층 사람들의 생각을) 엿보기에는 이만한 창구도 또 없다 싶어 곧잘 들여다봤다. 그러다가 얼마 전 완전히 멈추게 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 유독 트위터가 이 나라(베트남)에서 잘 안 되는 이유는 아마도 중국의 사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하다. 검열이 일상인 공산국가에서 살고 있으니 그러려니 한다. 한국에서 책 몇 권 받아 보는 데도 검열로 뜯긴 봉투의 흔적을 씁쓸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게 현실이니까.


지난 여름 이후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연결되던) 트위터는 아예 접속이 안 된다. 어차피 트위터를 사용하지 않은 지 꽤 되었기 때문에 별 아쉬움은 없지만 그래도 왠지 이런 식의 마무리는 좀 아니다 싶은 생각도 든다. 물론 순수한 접속 장애일 수도 있다(고 믿는다). 기술적 결함이라든가 뭐 그런. 


페이스북을 별도로 사용하지 않고 트위터와 연동해서 사용하던 내게 트위터와의 고별은 곧 페이스북과의 고별로도 이어졌다. 트위터로 연결되어 있는 지인과 페이스북으로 연결되어 있는 지인이 꼭 겹치는 것은 아니다 보니 두 계정을 함께 운용하는 것이 꽤 번거롭고 성가시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나마 트위터는 (주로 다수의) 익명의 얼굴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페이스북보다는 덜 폐쇄적이었다. 때로 테러를 당할 수도 있다는 위험 부담이 있긴 하지만 정치 및 종교적 발언만 적절히 자제한다면 꽤 안전하게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페이스북은 ‘우리들만의 리그’ 성격이 강하다 보니 개인의 시시콜콜한 일상이 일거수일투족 올라왔다. (사진과 함께!) 트위터가 140자 글자 분량의 한계를 지닌 것에 비해 페이스북은 좀더 긴 호흡을 표현하기에 좋았기에 나의 지인들은 속속들이 트위터를 떠나 페이스북으로 옮겨갔다. 허락된 이들만 페친(페이스북 친구)이 될 수 있다는 폐쇄성도 한몫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공적으로 공개되어 있는 이들이 좀 있다 보니 개인적 이야기까지 트위터에 올리는 부담을 지기는 싫었을 것이다. 


좀더 긴 생각들을 엿보고 주절대는 채널로서는 페이스북이 좋았지만, 이제는 부담 없이 올라오는 사소한 개인사들이 긴 호흡의 생각들을 앞질러 때때로 부담스럽기까지 했다. 특히 시도 때도 없이 올리는 가족과 아이들 사진(내 가족 사진도 이렇게 자주는 못 볼 것이다), 식당에서 찍어 올린 음식과 각양각색의 술 사진(정보 공유일까 자랑일까), 각종 회식 사진(누가 누가 모여 술을 마셨나), 자신이 만든 근사한 음식 사진(자랑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한다), 새로 산 물건 사진(남의 집 세간살이까지 알아야 하나) 등등. 알 권리 못지 않게 모를 권리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안 보면 되지, 웬 말이 이리도 많담!)  


그렇다. 안 보면 된다. 혹은 봐도 무심히 지나치면 된다. 그러니 이 참에 아예 잘 되었다는 생각마저 드는 걸 보면, 때 되면 돌아오는 ‘자기 유폐’의 계절이 다시 온 것일 수도 있겠다. 


한때 장기하의 노래들을 좋아해서 카톡 대문에 ‘난 별일 없이 산다’라는 문구 하나로 몇 년째 버티고 있는 나이지만(사람들은 대문 사진과 글귀를 요리조리 어찌나 자주 바꾸는지 가끔 이 사람이 내가 아는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이따금 이조차도 - 그러니까 난 별일 없이 산다,라는 내 안부조차 굳이 밝히고 싶지 않은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끔 나를 기함하게 만드는 것은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지나친 친절함, 즉 과도한 오지랖이다. ‘알 수도 있는 사람’이라든가 ‘이 사람을 팔로우하세요’ 라는 식의 간섭은 놀라움을 넘어서 사생활 침해로까지 여겨질 지경이다. 아, 그렇다면 조용히 살고 싶은 나의 이름이나 얼굴이 (내 이름이나 얼굴을 반가워하지 않을) 사람들에게도 이런 식으로 무방비 상태에서 ‘알 수도 있는 사람’으로 떡 하니 뜬다는 이야기 아닌가. 관계 맺기를 종용하다니, 이 무슨 해괴한 삐끼 노릇인가. 하긴, 이것조차 그러거나 말거나, 이긴 하지만. 


무슨 말을 하다 말았지? 아, ‘난 별일 없이 산다’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타인이 굳이 묻지도 않는 나의 안부에 대해 굳이 나 잘 살고 있다,라고 밝히는 것은 마치 별일 있지만 별일 없는 것처럼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혹은 별일 없는 나날들이 너무 지리멸렬하여 나 이렇듯 별일 만들며 즐겁게 살고 있노라,고 밝히는 것 같지 않은가. 

자격지심일 수도 있고, 제발 나 좀 봐주세요, 일수도 있는 일에 자발적으로 노고를 아끼지 않는 이 땅의 모든 외로운 이들, 마음이 허한 모든 이들(나도 그닥 다를 게 없으니)을 이해 못할 것도 없다가도 어느 날 문득 무슨 심통이 일었는지 “휴, 이게 다 뭐라고!” 하며 저 혼자 슬쩍 발을 빼려는 고약한 모양새다. 고약하든 말든. 당분간 트위터는 못하게 될 터이고, 페이스북은 굳이 따로 안 하게 될 터이니 나의 디지털 소셜 네트워크의 강도는 점차 더 약해질 전망이다. 이전에도 뭐 그리 튼튼했다고는 볼 수 없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시작했던가? 아, 페이스북 심리학,이라는 책 소개 때문에 촉발이 되었군. 글쎄, 어떤 내용일지 가히 짐작이 간다. 사람들이 ‘좋아요’를 눌러주지 않아 자신이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 된 것 같다,는 사례에서부터, 주위 아는 사람들의 행복한(그렇게 보이는) 일상 생활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시기와 질투에 괴로워하는 사례, 나를 포장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가면을 만들어내는 모습에 자괴감을 느끼는 사례까지, 다양하지 않을까. 


그러면 문제의 핵심 키워드는 역시 ‘타인의 시선’에 있을 것이다. 헤겔의 인정 투쟁, 라캉의 대타자의 욕망도 슬쩍 언급될 수 있겠다. 그렇다면 가장 진부한 (그러나 이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처방은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세요’가 될 수도 있겠다. 


아마도 가장 단순 명료한 처방은 ‘SNS하는 시간에 책을 읽으세요’ 정도 되지 않을까. 그런 처방은 사실 나도 내려줄 수 있는데. 어찌 되었든 SNS 중독으로 ‘아바타’와 ‘나’ 사이의 정체성 괴리로 괴로워하느니, 책 중독으로 아예 ‘나’ 속에 기어 들어가 그 안에서 고뇌하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 고뇌를 또 다른 SNS 형태인 블로그로 옮겨 완전한 익명의 바다 속에서 비슷한 이웃들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사람 성향마다 다르므로), 내가 올린 음식 사진에 척 하니 엄지 손가락을 올려주는 (아는) 이가 몇 명인지 세보는 것보다는, 내 하잘것없는 생각 한 조각에 공감을 표해오는 단 한 명의 (모르는) 이웃에 의해 더 많은 위안을 받을 수도 있음을 조심스레 말해줄 수도 있겠다. 

다 그런 것은 아니어도 대체로. 


2015-10-5 


P.S.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늘 그런 것은 아니어도 대체로.  

https://youtu.be/RAcKxh8CP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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