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들이다
이사 후 집 정리가 거의 끝나자, 마음에 담아둔 그림 몇 점을 벽에 걸었다. 온라인에서 손쉽게 유명 아티스트들의 그림을 고르고 액자를 선택해 구매할 수 있는 세상이다. 덕분에 수많은 그림들을 감상하면서 집에 걸어놓고 싶은 작품들을 골랐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현관 정면엔 엘스워스 켈리의 '오렌지와 블루'를, 거실엔 이우환의 '선으로부터'를 걸었다. 식탁이 놓인 벽면엔 빅토리아 보르헤스의 '트로피카' 시리즈를, 침실과 서재 사이 좁은 벽에는 로낭 부훌렉의 '무제 3'을 걸었다. 미니멀한 추상화를 선호하는 취향이 인테리어라는 현실적 요구와 만나 적절한 합의점을 찾은 결과이다. 방문한 동생은 로낭 부훌렉의 그림을 보고 '긴 양말' 같다고 했고, 엘스워스 켈리의 그림 앞에선 고개를 갸우뚱했다.
# 엘스워스 켈리의 <오렌지 블루>
블랙, 화이트, 그레이를 선호해온 내가 주황과 파랑에 끌리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으로 이주하고 나서이다. 열대 나무의 다양한 초록 스펙트럼, 빨강이나 주황 혹은 보라와 같은 원색의 꽃들, 노란 가로등과 겨자색 담장, 검은 사이공 강과 파란색 수영장. 정신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육체적으로는 이러한 비비드한 색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어느 날, 집 근처 야외 수영장에서 아이가 수영을 배우는 동안, 나는 두 가지 색이 강렬하게 충돌하는 이미지와 마주치게 되었다. 파란색 페인트를 칠한 담장을 배경으로 타오르듯 피어난 주황색 꽃. 나는 이끌리듯 사진을 찍었고, 어딘가에 별도로 저장해두었지만, 지금 그 사진을 찾는 것은 다소 난감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강렬했던 이미지만큼은 여전히 남아, 엘스워스 켈리의 '오렌지 블루'를 보는 순간 즉시 연상 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곧바로 그림 사진을 캡처하고 장바구니에 담아두었으니까. 거실 커튼 색상을 (예전이라면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블루로 결정하고, 쿠션 커버 색상으로 오렌지를 선택한 것도(이것은 엄청난 변화이다) 이런 맥락이 작동했을 것이다. 검정-회색 일변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크리스티 옥션 웹사이트에 들어가보니 실제 작품 사이즈는 16 x 12 인치(40.6 x 30.5cm)로 크지 않다. 경매 예정가 범위(estimate range)는 USD 900,000 - USD 1,200,000. 시장에서 억대에 거래되는 그림을 원하는 사이즈에 원하는 액자로 담아 몇만 원에서 몇십만 원대에 저렴하게 구매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다. 구매자의 취향과 집의 분위기 혹은 인테리어에 맞게 그림을 고르고, 사이즈를 정하고, 액자를 어떤 것으로 할지 선택하고, 매트를 댈 것인지 말 것인지, 댄다면 몇 센티미터, 몇 단으로 할 것인지까지도 구체적으로 정한 후 결제 버튼을 누르면 1주일 안에 주문 제작한 그림이 집으로 배송된다. 요즘엔 액자 와이어도 쉽게 구할 수 있어서 원하는 공간에 와이어를 고정시켜 걸어두면 그럴듯한 갤러리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그림의 원작 여부에 따른 '아우라'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이지만, 오리지널에 가까운 작품의 색과 형태를 '집에서' 감각하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에 나는 만족할 따름이다.
# 예술과 풍경
규정할 수 없음,에 끌리는 나의 취향은 그림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듯하다. 색과 형태가 주는 의미를 곧바로 포착할 수 없는 그림. 그렇지만 색과 형태 자체가 나의 감각을 흔들어, 모호한 이미지로 바닥에 가라앉은 과거의 어떤 기억 혹은 시각적 경험을 휘저어 되살리는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 미술 비평가 마틴 게이퍼드의 <예술과 풍경>을 읽다가 나는 베트남에서 보았던 파랑과 주황의 이미지가 엘스워스 켈리의 그림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어 매우 반가운 마음이었다.
그(엘스워스 켈리)는 항상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과 식물, 그중에서도 특히 꽃을 그린다고 내게 설명했다. 식물학자처럼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 형태나 형태들 사이의 형태들, 그의 말을 직접 옮기자면 "양의 공간과 음의 공간이 만드는 패턴"에 관심을 둔다고 설명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미술가의 눈을 필요로 한다. 미술가가 아닌 사람 중에 사물의 틈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 마틴 게이퍼드, <예술과 풍경>, 을유문화사(2021), '엘스워스 켈리 : 눈을 키우기' 259쪽
예술가의 눈에 보이는 사물의 틈. 나는 "사물의 틈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에 한번 더 매료된다. 시인과 화가의 눈이 다르지 않다.
엘스워스 켈리가 뉴욕에서 길을 걷다가 녹색과 흰색이 섞인 스카프를 맨 여성을 길에서 보고 그녀를 쫓아가서 녹색과 흰색의 비율을 정확히 확인했다는 일화는 퍽 흥미롭다. 저자가 켈리에게 스카프의 어떤 부분이 그토록 강한 영감을 주었는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내 생각에 그들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아요. 내가 찾아다니지는 않고, 갑자기 어떤 게 내게 와서 모습을 드러내는 거죠. 마치 내가 그곳에 있는 것처럼요.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내 눈은 이해한다고 생각해요. 나는 눈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어요. 내 눈을 키워냈어요." (같은 책, 같은 쪽)
저자는 모든 창조적 활동의 진실이 이와 같을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말, 소리 혹은 형태나 색깔에 대한 감각 같은 원재료가 어디에서 오는지 잘 모른다. 다만 편집하고 다루는 법을 배울 수 있을 뿐이다"라고.
저자가 엘스워스 켈리를 인터뷰하며 받아적은 화가의 육성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최근 그림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대변해주는 듯한 목소리랄까. 예컨대 이런 것.
"무언가를 묘사하는 데에는 관심이 점점 사라졌어요. 르네상스 이후 이젤 회화는 무언가를 묘사해왔는데,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어요. 더는 아무것도 묘사하고 싶지 않다고. 다른 모든 것처럼 회화는 그냥 회화처럼 보일 수 있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어떤 걸 그린 회화가 아니라 그 자체가 되길 바랐어요." (261쪽)
그의 미니멀한 추상화는 단순한 색면의 구성이라는 점에서 몬드리안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저자는 켈리를 하드에지(hard-edge) 추상화파나 1960년대의 미니멀리즘 운동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적인 스타일로 바라보는 듯하다.
"구성하고 싶지는 않아요. 빨간색과 파란색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저곳에 노란색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아내려고 애쓰고 싶지 않아요. 내 생각에는 워홀도 비슷하게 했던 것 같아요. 우연히 작업이 이루어지게 놔두고 관객과 회화 사이에 어떤 개성도 개입하지 않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거죠. 작품 자체로 존재하도록 놔두는 거예요."
치밀한 계산과 의도된 구성보다는 우연의 개입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면서 작품이 자체로 말을 이어가도록 놔두는 것. 내가 끌리고 좋아하는 시나 영화들 중에도 이런 식의 작업 방식을 표방하는 작품들이 있다. 주체가 사라진 문장이 우연한 단어의 배열에 의지하면서 다음 문장을 끝도 없이 이어가는 김언 식의 시적 발화라든가. 잘 짜인 시나리오나 간단한 트리트먼트도 없이 아주 단순한 시놉시스 하나만 달랑 놓고 그날그날 우연히 첫 대면하는 이미지나 대상, 생각으로부터 촉발된 것을 찍어 나가는 홍상수 식의 영화라든가.
이조년은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라고 읊었지만, 현대 창작에 있어서만큼은 '다상(多想)도 병(病)인 양하여'라고 말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생각의 양'이 아니라 대상을 '알아볼(포착할) 수 있는 순간'일 것이다. 물론 기본적인 양이 전제되어야 '양의 질적 전환'도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깨어 있을 때 항상 눈을 뜨고 있어요. 눈을 쓰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무언가를 보기보다 생각에 잠기는 경우가 많죠. 실제로는 집중하는 게 아니에요. 만약에 무언가에 집중하고 그것을 알아보기 시작한다면,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생각을 멈추고 눈을 뜨면 모든 것이 추상적으로 변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눈이 작업하는 방식'을 벤치마킹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를 바라볼 때 그는 스스로에게 말한다고 한다. "저걸 그리고 싶지는 않지만, 저것과 유사한 뭔가를 만들고 싶다. 나는 저런 성질을 가진, 저렇게 압축된 뭔가를 구축해보고 싶다."
꼭 회화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경험한 시선의 파편 중에 기록하고 싶은 것"을 어떤 방식으로든 남겨놓으려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일 것이다. 어느 때는 사진으로, 어느 때는 두서없는 메모로. 무언가를 만들어 표현하고픈 욕구는 인간의 본능일 것이다.
저자가 25년간 전세계를 돌며 만난 예술가들을 살펴본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로버트 프랭크, 게르하르트 리히터, 로니 혼, 로버트 라우션버그 등등. 가상의 경험이 아닌 실제 경험, 즉 실제 작품을 감상하고 실제 사람과 만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깊고 풍요로운 경험이라고 말한 저자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복제된 이미지를 통해서나마 시든 감각에 자극을 주고 느낌과 생각에 길을 내줄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도 흡족한 일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것이다.
# 마크 로스코, 로낭 부훌렉, 이우환, 김점선
그런 의미에서, 나를 위해 마크 로스코의 그림 한 점을, 남편이 좋아하는 김점선의 '붓꽃'을 추가로 주문한다. 남편은 내 서재에 걸린 로스코 그림을 보며 (그는 로스코 그림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 그림만큼은 마음에 든다고 했다), 옐로, 오렌지, 퍼플, 블랙, 그린이 주는 자신의 느낌을 내게 말해주었고, 나는 그 시간이 좋았다. 점과 선에 천착한 화가 이우환의 푸른 선들을 나란히 바라보는 것도, 로낭 부훌렉의 드로잉들 중 내가 선택한 '무제 3'이 왜 마음에 와 닿았는지(시간, 연결, 변곡점 등과 같은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구체적 대상을 지시하지 않는 그림을 보며 형태와 색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이 주는 모종의 움직임과 리듬에 대하여 서로의 느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고양된 순간인가.
한때 점과 선을 모티프로 시를 쓰고자 했던 내게 이우환의 그림은, 언어로 그려내는 데 실패한 어떤 관념적 이미지를 단 한 점의 그림으로 시각화하는 데 성공한 작품으로 다가온다. 문학과 철학을 공부한 작가의 이력도 무시할 수 없겠지만.
예술이 문화 산업이 된 지는 오래되었다. 아도르노는 문화 산업을 비판했지만, 표준화되고 획일적인 (자본과 결탁한) 문화 산업이 (특권 계층이 아닌) 우리의 일상을 조금이나마 다른 풍경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활력이 되기도 한다면 그 날 선 비판의 칼날도 조금은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작가가 자신의 작업만으로 경제 활동의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환경을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자본과 시스템이 이들을 위한 긍정적 플랫폼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여전히 믿고 싶다.
마틴 게이퍼드는 책의 서문에서 영국 화가 질리언 에어스(Gillian Ayers)의 말을 전한다.
"그림은 벽에 걸 때마다 달라 보여. 매번 빛이 다르거나, 사람이 다르거나, 무언가가 달라. 정말 좋아. 항상 다시 살펴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 변화 때문이거든. 좋아!" (같은 책, 서문 20쪽)
모든 것이 변하고, 그 끝없는 변화를 축복으로 여기는 한, 우리는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른다. 창작이든, 감상이든.
집에 쉽게 그림을 들일 수 있어야 하는 이유일지도.
(2021-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