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번째 감탄, 백만번째 저녁

이경림의 시 '만찬'에 부쳐

by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만번 죽었다가 백만번 태어난 고양이 이야기를 읽고 나니

저녁이 왔다


백만번 죽었다가 백만번 태어난 행운목이 시푸르게 서 있는 거실에

저녁이 지나가고 있다


엄마는 헝클어진 머리로 백만번째 침상으로 들어가고

저녁이 깊다


백만번 죽었다가 백만번 태어난 어둠이 미친 듯 이글거린다


백만번 죽었다가 백만번 태어난 아침을 빼물고

애완견 슬기가 헐떡거린다


어디선가 민들레 같은 것이 깨진 보도블록 틈새를 비집고 노랗게 죽고 있으리라


백만번 죽고 백만번 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때까치들이 깍깍거린다


백만번 죽는 일은 백만번 태어나는 일이라고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백만번 태어나는 일은 백만번 죽는 일이라고

한 청년이 담배를 꼬나물고 간다


어쩌다, 무엇 때문에, 백만번이나 죽었는지

백만번이나 태어났는지

백만번 생각해도 모를 일


나는 다만 저녁의 마트에서

백만번 죽은 브로콜리와 백만번 태어난 콩나물과

백만번 죽은 시금치와 백만번 태어난 돼지고기와 고등어를

사 들고 와 백만번째 식탁을 차릴 뿐


- 이경림, <급! 고독>, 창비, 2019, '만찬' 전문





이경림 선생의 내공은 여전하구나. 감탄한다. 저녁에서 아침까지 별다를 것 없는 일상의 풍경에서 덧없는 것의 영원한 반복을 펼쳐내고 있다. 회귀와 반복.


내 감탄은 아직 백만번째에 이르지 못했지만, 이런 식의 감탄은 백만번을 넘고도 그 백만번의 백만번째 반복되고 있겠지. 반복되는 감탄은 매번 조금씩 달라지고, 그래서 계속 다를 것이고. 나의 감탄은 (그 누적된) 다름의 총합 안에서 또 조금 달라진 것일 테고. 그래서 또 다르다 할 수 있을 것이고.


오늘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우게츠 이야기>를 보았고, 백만번 죽은 감독들과 백만번 태어난 감탄들을 생각해보았다. 롱테이크와 원 신 원 쇼트(one-scene, one-shot)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고,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카메라 워크를 생각해보았다. 백만번의 전쟁과 폭력, 백만번의 비참한 현실, 백만번의 희생당하는 여성, 백만번의 어리석은 욕망 등등 백만번 죽고 백만번 태어난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나 역시, 백만번째 메모를 급히 남기고, 백만번째 시계를 보며, 백만번째 저녁 식탁을 준비하러 나간다.


백만번째 저녁이 지나가고 있다.


(202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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